시로 여는 일상

비망록/ 김경미

생게사부르 2020. 8. 4. 08:19

 

비망록/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신(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 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싱일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 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더 행복 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 줄는지 아무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 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듯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 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얼음을 주세요 / 박연준

 

 

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빛 눈물을 흩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장난질도 안쳐요
더 이상 날아가는 초승달을 잡으려고 손을 내뻗지도
걸어가는 꿈을 쫓아 신발끈을 묶지도
오렌지주스가 시큼하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아요, 나는 무럭무럭 늙느라

케이크 위에 내 건조한 몸을 찔러 넣고 싶어요
조명을 끄고
누군가 내 머리칼에 불을 붙이면 경건하게 타들어 갈지도
늙은 봄을 위해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있을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 하며 나를 찌르겠죠
그러면 나는 흐르는 내 생리혈을 손에 묻혀
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새벽길들이 내 몸에 흘러와 머물지
모르죠, 해바라기들이 모가지를 꺾는 가을도
궁금해하며 몇 번은 내 안부를 묻겠죠
그러나 나는 이제 멍든 새벽길,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아요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창비. 2007.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이원하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거에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히 알게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내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엔 끝이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에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에요

 

나는 제주에서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 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     *     *

 

 

김경미 시인은 같은 세대,

' 비망록' 같은 시 한편만 써도 평생 사랑받는 시인이겠다

 

' 삶에 대한 의문에 神은 답을 주지 않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없는 눈물 같은 것인 스물네 살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더 오래 거짓을 겨루든,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를 낳'을 수도 있는 ...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스물다섯 살

 

그렇게 시인은 시를 쓰고 방송일을 하면서 이제 한 갑자 넘고 있고

삶에 대한 통찰은 익어가되 현실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는지 그 이후의 시들이  그렇게 힘들어 보이지는 않는다

 

새소리가 싫은 것

날개를 얻으려 뼛속이 텅비다니! 

유리창 옆에 혼자 있는 건 산꼭대기 구름처럼 높은 일

-   ' 나, 라는 이상함'

 

' 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새벽길들이 내 몸에 흘러와 머물지
모르지만...
그러나 나는 이제 멍든 새벽길,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 는 ...

 

조카 뻘 박연준 시인은 장석주 시인과

삶 자체를 시로, 문학과 함께 살면서 인생 중반을 건너고 있고

 

두 사람의 여성시인이 과거 비망록이 되었다면

이원하 시인은 딸보다 작은 나이... 현재의 이십대다.

곧 설흔이 되겠지만...

 

 

이 다음 단계가

박연준 시인의 ' 서른' 이나 ' 최영미 시인의 '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