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조행자 2. 생의 한 저녁, 하오 6시 풍경

생게사부르 2016. 3. 1. 20:40


조행자 2.

생의 한 저녁

말하지 않아도 되는 날은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편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나를 죽은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들의 생각이 그럴 수 있다에 머물렀을 때
난 그저 씩 웃으며 마음을 지웠다

어두운 대기 속으로 몸을 감추는
들꽃 길을 따라가며
내 존재의 자리는 어디인가란 생각보다
무관심에 관한 긴 휴식을 떠올렸다

가끔은 어둠의 가장 깊고 부드러운 안식에서
수 없이 그렸다 지웠던 욕망의 얄팍함에 기대었던
어둠의 과거를 생각했다

무엇인가 지상에서의 부질없는 것들은
누가 나를 죽은 사람으로 생각해도
내 부재의 자리를 가볍게 즐기는 오늘 저녁 생이여,

그래도 끝내 삶을 버려두지 않기에
마음 지운 자리 꼿꼿이 피어낸 망초꽃 한다발


- 시집 <지금은 3시> 2007, 만인사 -


하오 6시의 풍경


하오 6시의 황혼은
길 밖에 길이 있어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는 언제나
그 길 안에서 황홀해한다
그 길 위로 알 수 없는 노래, 기타소리가
흘러가고
그 길 위로 알 수 없는 인기척, 기침소리가
지나가고
그 길 위로 우수수 떨어지는 추억
은사시나무 그림자 사이로
한때의 격정이 끓어오르고
믿음의 산책로를 걷기 위해 신을 신는 황혼의 발
내 포켓 속 짤랑거림도 기뻐하며 따라 나서는
하오 6시의 명백한 이끌림
나는 아름답고 은밀한 속삭임만을 엿듣는
세상의 귀가 되고 싶다
잘 익은 풍경 한 잔을 마시고 싶다

- 시집 <이상한 날의 기억>(시와시학사, 1992)

 

1941년-2013. 대구 광역시

 

영혼의 자유로움을 느끼고 싶어 시를 잠시 접었는데

시 속에 내 자유로움이 있다는 걸 느꼈다.

  

      블로그 <詩 하늘 통신>에 조행자 시인 시 많이 올라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