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서정주 2. 자화상, 전두환 예찬 시(?)

생게사부르 2016. 2. 26. 23:40

 

서정주 2. 자화상, 전두환 탄신일 송시

 

얼마전 법보 신문에 미당의 시가 올려졌는데, 댓글에 ' 지금 시대가 어느시대인데 아직도 이런 친일파 글을

싣고 있느냐, 당장 내렸으면 좋겠다'고 일갈한 내용을 접했습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름다운 시를 썼던 시인이 어떻게 사는 삶이 시인다운지,

바른 삶인지 고민하는 인생철학, 역사의식 없이 살았던 것 같습니다.

살아서 시인으로 누릴수 있는 최상의 영광을 다 누렸으나 죽어서 오욕으로 얼룩지고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자화상(自畵像)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기퍼도 오지 않았었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 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 도라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숯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 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어떤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우에 언친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꺼(섞여) 있어

볕이나 그늘이거나 혓바닥을 늘어뜨린

병든 숫개만양  헐떡어리며 나는 왔다.

 

< 화사집, 남만서고, 1941 >

 

언어의 연금술사, 신라향가 이래 최고의 시선(詩仙), 살아있는 시신(詩神)

시인들을 신민으로 거느린 시 왕국의 왕, 살아 있는 시사(詩史)

미당 서정주를 표현하는 현란한 수사와 경의, 극찬의 찬사는 끝이 없습니다.

 

1915년에 출생하여 2000년 돌아가실 때까지 詩歷 70년, 15권의 시집, 1천여편의 시와 산문을 남겼고

국화옆에서와 푸르른 날은 교과서에서 또 노래로 접하였으며

초중고 정규교육과정 속에서 10여편에 가까운 그의 작품을 우리는 공부 해 왔습니다.

황동규, 박재삼, 문정희 시인 등 백명이 넘는 시인들이 미당을 통해 등단하여

가히 미당스쿨로 불리면서 지금도 우리의 시단에  '서정주 사단'이 건재합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접신술사'라든가 '현대시인이 아니라 전근대 시인 '으로 폄하되거나

더 나아가면 시는 잘 썼지만, 개인영달 이외 사회의식, 역사의식이 없었다거나

혹 있었더라도 그릇된 어리석은 인생을 살았다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를 올려봅니다.

 

처음으로

한강을 넓고 깊게 또 맑게 만드신이여

이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 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 하셨으니

잘 사는 이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 날리셨나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 아시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하고

또 88 서울 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

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으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힘으로 남북대결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 민주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고 있나니

이 나라가 통일하여 홍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쉬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분이여 !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위 사진은  마포구 공덕동에서 1970년 이사하여 시인부부가 타계할 때까지 30년을 살았던 서울 관악구 남현동 집을

손질하여 기념하는 곳입니다.

미당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고창의 생가를 사 들였던 것 같고

'미당 시 문학관'은 2001년 고향이자 영면지인 생가 인근 마을 폐교였던 선운초등학교  봉양분교를

문학관으로 꾸며 기념하고 있습니다.

지역 시민단체의 꾸준한 요구를 받아들여 2002년부터는 친일작품을 기존의 작품과 함께 전시하여 그 삶의

흑역사도 함께 볼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