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김정란-사랑으로 나는, 말,길 계곡

생게사부르 2016. 3. 3. 21:28

김정란 2.



사랑으로 나는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았던 매미날개와 매미 날개에 머무는 햇살과
그 햇살의 예민한 망설임들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지 못했던
오로라와 그 오로라가 우주 먼 곳에서 태어나지 않은 역사와 맺는
관계를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언젠가 그 칼들이 나를 더
이상 아프게 하지 못 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죽어 가는 세계의 모든 생명들과 이제 막 태어나는 어린생명들과
하나가 되고 싶다, 될것이라고 믿는다, 될것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이며 너이며

그들이다. 사랑으로 나는 중심이며 주변이다 사랑으로 나는 상처의 노예이며

주인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를 세계의 상처위에 겸손하게 포개 놓는다

세계, 나의 아들이며 나의 지아비인 세계의 상처위에 나처럼 아프고

불행한 세계의 상처위에, 가만히, 다만 가만히

 

 

 

말, 길,

            -계곡

 

말이 길을 이루는 것인지

길이 말을 이루는 것인지

 

아니면 말과 길이 동시에

서로를 규정하고 만들어 가는 것인지

아니면 제각기 서로 따로 가는 것인지

지금은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본다

미어지는 가슴들, 미어졌던 가슴들 위에

포개어져 부드럽게 시간의 물살로

상처를 상처로 달래며

흘러 가는 것

상처가 상처로 설명되면서

맥락을 지극히 좁게 가두면서 그래서 사실은 절대적으로 열면서

세계의 말에 이른다는 것

바위는 시대처럼 버티고 있다.

그러나 비참의 말들

맥락과 맥락으로 드나들면서

 

밤의 신성함을 배웠다 가난 속에서

어느새 미어터져 밀려나면서

시간을 밀어 내면서 껴안으면서 다시 밀어 내면서

 

지독한 수동성의 능동성을

 

물이 된 하늘을

길이 된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