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최문자 낡은 사물들

생게사부르 2019. 8. 16. 23:55

 

낡은 사물들/ 최문자


멀리서 보면

지구의 지름에 서 있는 기분
이 오래된 길을 쭈욱 걸어서 가면 빙벽이 나타나고
우리는 깨끗한 새를 만나겠지

당신의 반대편에서 자고 반대편에서 일어나
가장 먼거리에서 당신을 바라봤다

멀리서 보면
당신은 얼굴이 없다

수십억 개의 팔들이 지구를 껴안고
바람만이 완전한 지구의 둘레가 되고 만다

아무리 긴 지구도
피로 쓰면 한 페이지

아무리 어두워도
하루는 무섭게 반짝인다

멀리서 보면
넣을 수 있는
주머니는 모두 닫혀 있고
사랑은 갈수록 납작해

외로움은
배고픔은
멀리서 봐도
번쩍거리는 비극

더 멀리 가서 더 멀리 보면

지구는
잘 보이지 않는 낡은 사물
무섭고 겁이 나는 고체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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