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환한 방들/ 김혜순

생게사부르 2019. 8. 19. 14:40


 

 

환한 방들/ 김혜순


 

복사기가 일초에 한번씩
해바라기를 토해내고 있다
잠시 후 돌아보니 방안 가득 해바라기 만발이다
어찌나 열심히 태양을 복사했던지
고개마다 휙 젖혀진 해바라기 꽃밭 사이
평생 늙지도 않는 소피아 로렌이 걸어 나올 것 같다

나의 복사기,네모난 환한 상자
나는 복사기 안으로 들어설 때마다
피라밋 투탄카멘에서 출토된 미라처럼
가슴에 품었던 검은 꽃다발을 공기 중에
산화시키며 미소를 날린다

밥 해서 먹이고 웃겨줘야 할 입들이 들어찬 방
외풍과 한숨이 들락날락하는 환한, 나의 방

일초에 한번씩 불켜진 복사기가
내 몸을 밀었다 당겼다 할 때마다
들숨은 들어가고 날숨은 나온다

지하철 4호선 긴 의자에 앉은 내 얼굴이
복사된 얇은 종이가 벌써 수억만 번째
희미한 빛 속에 가라 앉고
원본은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내 얼굴
이미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내가
또 한번의 출퇴근 궤도를 그리고 있다

집에 돌아오면 마멸이라는 이름의 비누로 얼굴을 씻고
마멸이라는 이름의 크림으로 얼굴을 지우고
오늘 밤 복사된 내가 철(綴)해진
스프링 노트를 힘껏 찢어 버린다
과연 나는 내 몸에 살고 있는 걸까
마지막으로 복사되다만 내 미소가 떠 있는
환한 방의 스위치를 내리면
복사기 네모난 상자도 어두워지고
내 몸도 관(棺)속처럼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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