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비는 비린내/ 길상호

생게사부르 2019. 4. 28. 11:56

비는 비린내 / 길상호


 

 

사료를 부어주던 할머니 대신
오늘은 한 백 년은 더 늙은 구름이 와서
그릇마다 가득 물이나 채워주고 갔다

기울어진 담장 너머 저녁의 발톱이 길어지는 시간
버려진 줄도 모르는 화단의 꽃들은
물 빠진 꽃잎을 서로 핥아주며 저물었다

빈집이 키우는 아기고양이만 야옹야옹
소리를 갖고 있어서 , 그 작은 입으로
빗방울의 동그란 울음을 흉내 내다 그치면
이제는 빗방울도 고양이가 되어 울었다

슬레이트 지붕 끝에 매달려서 야옹
버려진 고무신 뒤꿈치를 적시면서 야옹

빈집이 잠시 깨진 눈을 깜빡이며 일어나
소리들을 모두 쓰다듬어 재우고 나서야
늙은 구름도 조용히 서쪽으로 발을 옮겼다

비가 전해주고 간 아득한 비린내를 덮고
빈집은 때 이른 초저녁잠에 들었다

 

 

 

 

 

 

'시로 여는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택수 흰둥이 생각  (0) 2019.05.01
손택수 폭포  (0) 2019.04.29
유하 참새와 함께 걷는 숲길에서  (0) 2019.04.27
허수경 라일락  (0) 2019.04.25
송찬호 구덩이  (0) 2019.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