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심재휘 기적, 겨울입술

생게사부르 2019. 3. 15. 11:30

기적/ 심재휘


병실 창밖의 먼 노을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저녁이 되니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네

그 후로 노을이 몇번 더 졌을 뿐인데
나는 그의 이른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간다

하루하루가 거푸집으로 찍어내는 것 같아도
눈물로 기운 상복의 늘어진 주머니 속에는
불씨를 살리듯 후후 불어 볼 노을이 있어서

나는 그와 함께 소주를 마시던 술집을 지나
닭갈비 타는 냄새를 지나
그의 사라진 말들을 지나 집으로 간다

집집마다 불이 들어오고 점자를 읽듯
아직 불빛을 만질 수 있는 사람들이
한집으로 모여든다


겨울 입술/ 심재휘 


그대를 등지고 긴 골목을 빠져 나올 때
나는 겨울 입술을 가지게 되었다
오후 한시 방향으로 들어오는 낙뢰가
입술을 스치고 갔다

그 후로 옛일을 말할 때마다
꼭 여미지 못한 입술 사이로
쓰러지지도 못하는 빗금의 걸음을
흘려야 했다
골목의 낮은 쇠창살들은 여전히
견고했다
뱉어 놓은 말들은 벽에서 녹고 또
얼었다
깨어진 사랑이 운석처럼 박힌 이별의
얼굴에는
저녁과 밤 사이로 빠져나간 낙뢰가
있더니

해가 진 일곱시의 겨울 입술은
어둠을 들이밀어도 다물 수 없도록
기울어져서
들리지 않는 말들을 넘어지지 않게
중얼거려야 했다
진실을 말해도 모두가 비스듬한
후회가 되었다

 

 

 

 

     1963년강원 강릉시

     1997년 작가세계 신인상 수상

      대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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