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김이듬 시골 창녀와 진주 시 행사

생게사부르 2019. 4. 14. 11:36

시골 창녀/ 김이듬


 

진주에 기생이 많았다고 해도
우리 집안에는 그런 여자가 없었다 한다
지리산 자락 아래 진주 기생이 이 나라 가장 오랜 기생 역사를 갖고 있다지만
우리 집안에 열녀는 있어도 기생은 없었단다
백정이나 노비, 상인 출신도 없는 사대부 선비 집안이었다며 아버지는 족보를 외우신다
낮에 우리는 촉석루 앞마당에서 진주 교방굿거리춤을 보고 있었다
색한삼 양손에 끼고 버선발로 검무를 추는 여자와 눈이 맞았다

집안 조상중에 기생 하나 없었다는 게 이상하다
창가에 달 오르면 부푼 가슴으로 가야금을 뜯던 관비 고모도 없고
술자리 시중이 싫어 자결한 할미도 없다는 거
인물 좋았던 계집종 어미도 없었고
색색비단을 팔러 강을 건너던 삼촌도 없었다는 거
온갖 멸시와 천대에 칼을 뽑아들었던 백정 할아비도 없었다는 말은
너무나 서운하다
국란 때마다 나라 구한 조상은 있어도 기생으로 팔려간 딸 하나 없었다는 말은 진짜 쓸쓸하다

내 마음의 기생은 어디서 왔는가
오늘밤 강가에 머물며 영감(靈感)을 뫼실까 하는 이 심정은
영혼이라도 팔아 시 한 줄 얻고 싶은 이 퇴폐를 어찌할까
밤마다 칼춤을 추는 나의 유흥은 어느 별에 박힌 유전자인가
나는 사채이자에 묶인 육체파 창녀하고 다를 바 없다

나는 기생이다 위독한 어머니를 위해 팔려간 소녀가 아니다 자발적으로 음란하고 방탕한 감정 창녀다 자다 일어나 하는 기분으로 토하고 마시고 다시 하는 기분으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흔들며 엉망진창 여럿이 분위기를 살리는 기분으로 뭔가를 쓴다

 

다시 나는 진주 남강가를 걷는다 유등축제가 열리는 밤이다 취객이 말을 거는 야시장 강변이다 다국적의 등불이 강물 위를 떠가고 떠내려가다 엉망친창 걸려있고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더러운 입김으로 시골장터는 불야성이다

 

부스스 펜을 꺼낸다 졸린다 펜을 물고 입술을 넘쳐 잉크가 번지는 줄 모르고 코를 훌쩍이며 강가에 앉아 뭔가를 쓴다 나는 내가 쓴 시 몇줄에 묶였다 드디어 시에 결박되었다고 믿는 미치광이가 되었다

 

눈 앞에서 마귀가 바지를 내리고

빨면 시 한줄을 주지

악마라도 빨고 또 빨고, 계속해서 빨 심정이 된다

자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와 절박하지 않게 치욕적인 감정도 없이

커다란 펜을 문 채 나는 빤다 시가 쏟아질 때까지

나는 감정 갈보, 시인이라고 소개할 때면 창녀라고 자백하는 기분이다 조상 중에 자신을 파는 사람은 없었다 ' 너 처럼 나쁜 피가 없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펜을 불끈 쥔 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지금 지방축제가 한창인 달밤에 늙은 천기賤技가 되어 양손에 칼을 들고 춤춘다

 

 

                - 2014.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 시 수상

 

 

 *     *     *

 

 

 김이듬 시인의 거침없음이야 익히 알지만

시골기생도 아니고 ' 시골창녀' 라...

 

' 영혼이라도 팔아서 시 한 줄 얻고 싶은 이 퇴폐'

시인이라고 소개할 때면 창녀라고 자백하는 기분이며

' 감정 갈보'랍니다

 

 ' 시 한 줄 쓰려고'를 무려 여섯번이나 반복하면서

' 기어코 한 방울의 맹독을 완성하고 있을'

' 각시 투구꽃을 생각함'의 문성해 시인도 생각나고...

 

시교실 분들,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거나 (논술학원) 삶의 대부분을 다른 직업으로 보내고 만난 사람들은

쉬엄 쉬엄 시상이 떠오를 때, 시가 될 때 쓴 시들을 모아 시집 한두권 묶는 정도지만

평생 시를 쓰는 삶이 강제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직업시인들은 충분히 그럴 것입니다.

그 작업이 자신 스스로 선택한 길일지라도...

 

그 만큼 시 창작이 어렵고 힘들다는 얘기이겠지요.

 

어릴 때 진주는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습니다.

진주역에 내려, 칠암동 파출소가 있는 골목을 따라 큰집 가던 일 

진주성, 촉석루, 논개바위...부근에 재래시장 식물원이 있었던 것 같고

큰집 식구들을 따라 칠암성당에도 가 보기도 하고 한 여름이면 남강에서 목욕을 한 기억도 있습니다

 

 

그러고는 한참의 세월을 건너 뛰어 사십중반을 넘어서 50초반까지 대학원 공부하러 드나들었네요

마산에 근거지를 두고 창원 김해 진주등 도시를 다니다 보면

창원은 지방도시의 중심지답게 너무 앞서 나가고 진주는 내륙으로 주변이 농업중심이라

보수적이면서 다소 뒤쳐진 분위기를 접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남명의 정신적 유산이 고스란히 남은 선비도시고 교육도시답게 일정 수준을 지니는 도시이지요

무엇보다 강을 끼고 있는 도시는 특별한 느낌을 줍니다. 그야말로 천연자연이 주는 운치는 남다르지요.

 

다시 진주를 드나들기 시작했을 때

식사를 하러 골목 안 주택가를 찾아 들어가면 정원이나 연못이 있는 옛스런 분위기의 집들이 있었는데

이 전에  ' 방석집'이라고 불렸다고 해요

지금은 일반인들이 식사하러 찾지만 60-70년 전만 해도 지방의 유지급 인사들이

술을 마시며 기생들의 재능을 즐기던 곳이었겠지요.

 

위 시에서 진주가 우리나라 오랜 기생의 역사를 지닌 도시라하는 말, 빈발이 아닐 것입니다

'논개'도 논개지만 시 공부 마치고 가끔 식사하러 들리는 ' 산홍'도 기생이름에서 유래하니까요 

 

프랑스 파리 세느강이 숱한 예술가들이 시를 읊고 영화를 찍고 해서 유명해진 것이지

실제로 보면 진주 남강보다 깨끗할 것도 없다고 열변을 토하던 분이 계셨습니다.

 

위 시, 발화자는 시인의 시쓰기가 기생들 술시중 이상 어렵다는 것을 토로하면서 '진주'만의 역사에

대한 얘기를 시에 등장시키고 있네요

진주기생, 백정, 촉석루, 교방굿거리, 남강, 유등축제 같은

개천예술제, 유등축제, 드라마 페스티벌 같은 행사가 나름 진주를 특징 짓는 행사이고

자녀들의 학교 입학을 거부당하면서 시작된 백정들의 '형평운동' 은 진주를 시발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주에 ' 형평문학제'   행사가 있던데...

시교실 마치고 오후 7시에 시작되는 진주문고  ' 송찬호시인' 특강에 참석을 하고 올 것인지

어쩔 것인지 아직 결정을 못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 천수호 시인'이었는데 참석을 못했거든요.

 

' 형평문학' 행사와 ' 화요문학회 시인 초청' 같은 공식적인 행사나 비공식적으로 유홍준 샘 시교실 방문했던

시인들이 계셨는데 ...

박노정, 황현산 선생님, 박서영 시인은 이제 돌아가셔서 실제로는 뵐 수가 없네요.

이제 연령대가 생명이나 탄생보다는 소멸쪽으로 기울어서 자연의 섭리려니 하면서도

삶의 허망함이나 허무함을 새삼 절감합니다.

 

그럼에도 평일이면 운동을 하러가고 그 와중에 시 공부를 하고...책 편집이나 영상 관련 공부를 좀 해 보고싶은

생각이 아직 있는 거 보면... 열심히 살아야지요. 살아 있는 동안은...

 

 

 

 

  

 

 

                  

                   가운데 문성해 시인, 왼편 손영희 시인, 오른편 박노정시인 

                         진주서 시인들을 배출시키는 대부역할을 하신 분

                               진주지역서 활동하시는 시인들 

 

 

 

 

 

     진주지역서 활동하시는 시인들 기념촬영에 미향샘과 함께 있다가 혜선샘과 저는 얼떨결에 함께 찍었네요

            김언희, 장만호, 조민, 김지율, 문저온, 박미향 시인과 경상대 교수님 

 

          수학과 교수님 ... 시와 수학이 함께 통한다는 말씀이 융합이나, 통섭으로 받아들여졌던 기억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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