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례
레바논 감정
수박은 가게에 쌓여서도 익지요
익다 못해 늙지요
검은 줄무늬에 갇혀
수박은
속은 타서 붉고 씨는 검고
말은 안하지요 결국 못하지요
그럴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봐요
나귀가 수박을 싣고 갔어요
방울을 절렁이며 타클라마칸 사막 오아시스
백양나무 가로수 사이로 거긴 아직도
나귀가 교통수단이지요
시장엔 은반지 금반지 세공사들이
무언가 되고 싶어 엎드려 있지요
될수 없는 무엇이 되고 싶어
그들은 거기서 나는 여기서 죽지요
그들은 거기서 살았고 나는 여기서 살았지요
살았던가요? 나? 사막에서?
레바논에서?
폭탄 구멍 뚫린 집들을 배경으로
베일 쓴 여지들이 지나가지요
퀭한 눈을 번득이며 오락가락 갈매기처럼
그게 바로 나였는지도 모르지요
내가 쓴 편지가 갈가리 찢겨져
답장 대신 돌아왔을 때
꿈이 현실 같아서
그때는 현실이 아니라고 우겼는데
그것도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요?
세상의 모든 애인은 옛 애인이지요*
옛 애인은 다 금의환향하고 옛 애인은 번쩍이는 차를 타고
옛 애인은 레바논으로 가 왕이 되지요
레바논으로 가 외국어로 떠들고 또 결혼을 하지요
옛 애인은 아빠가 되고 옛 애인은 씨익 웃지요
검음 입술에 하얀 이빨
옛 애인들은 왜 죽지 않는 걸까요
죽어도 왜 흐르지 않는 걸까요
사막 건너에서 바람처럼 불어오지요
잊을 만하면 바람은 구름을 불러 띄우지요
그름은 뜨고 구름은 흐르고 구름은 붉게 울지요
얼굴을 감싸 쥐고 징징거리다
눈을 흘기고 결국
오늘은 종일 비가 왔어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봐요
그걸 레바논 구름이라 할까봐요
떴다 내리는
그걸 레바논이라 합시다 그럽시다
* 박정대: 세상의 모든 애인은 옛 애인이지요
* * *
레바논 감정?
이미 세상에 있는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도 있어서
시인은 새로운 단어를 만들었습니다.
녜! 시인은 언어의 창조자이니까.
레바논 공습이 한창일 때 쓰여진 시니 꼭 레바논이라 특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여기가 아닌 곳, 지금 여기의 현실감을 떠나 있는 다른 곳이면 어느 곳이든 상광이 없습니다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시인은, 어느날 TV를 틀었는데 예전에 알고 있던 사람이 레바논에서 살고 있는 것을 우연히 보았고,
그때 ' 아, 헤어졌으니까 잘 살고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레바논 감정이란 결국, 한때는 인생의 전부인냥 대단히 몰두했던 사람이나 시간들도 시간이 흐르면 잊히고
또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때의 기억과 마주하게 되면 갑자기 떠 오르는, 낡았지만 복잡 미묘한 감정의
흐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죽고 못살 것 같은 사랑의 기억도 생활전선에서 정신없이 살다보면 잊히거나 낡아가게 마련일 것이고,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가라 앉아 있던 지난 사랑의 쓰라린 기억과 마주하게 된다면, 쓸쓸하고 참담해 질 것도 같은,
낯선 자신과 대면하는 순간 같은 것,
무엇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지만, 결국 일상에 갇혀 그런 바람조차 잊고 살다가 문득 과거를 추억 하듯
잠시 그런 기억에 빠져드는 감정,
잠시 스쳐지나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그 순간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시인은 ' 레바논 감정' 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의 일상을 벗어나 있는 낯선 감정이라는 점에서, 이국적이면서도 이질적으로 보이는
" 레바논 감정" 이라는 조어는 낯설면서도 신선해 보입니다.
잊고 있던 자신과 대면하는 순간이므로 그것은 "레바논 감정처럼 낯설고 새로운 조어를 필요로 하는
감정일지도...
그리고 그 감정에 휘말리는 순간, 내가 살아 온 시간과 살았다는 사실이 문득 의심스러워 질지도 모르지요.
정말 나는 나로서 산 것인가, 그들은 거기서 살았고 나는 여기서 산 것이 맞는가, 하고 말입니다.
최정례 시인은 그래도 시간을 운명의 폭력이기보다 영혼과 육체, 역사 등 존재의 고유성을 기억하는
주름으로 보면서 기억 속에 떠도는 파편화된 체험들 속에서
자아의 결핍과 얼룩을 치유하는 존재론적 글쓰기
기억과 시간을 통해 자아의 존재론을 담아내는 글쓰기
비극적 현실앞에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희망을 노래합니다
2013년 ' 레바논 감정" 이란 제목의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네요.
시평에서 옮겼는데 좀 지난 자료이다 보니 원본을 못 찾아서... 시평쓴 이가 김경수? 확실하지 않네요.
'시로 여는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 22, 23 (0) | 2017.06.14 |
---|---|
최찬상 반가사유상 (0) | 2017.06.13 |
장석남 나의 울음터 (0) | 2017.06.10 |
물울, 물결 속에서/신영배 (0) | 2017.06.09 |
조은 따뜻한 흙, 담쟁이 (0) | 2017.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