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
나의 울음터
나의 첫 울음터는 어머니의 품이었겠지
그리고 그 울음은 그저 목화꽃 같았을거야
품속이었을테니까
나는 내가 울었던 장소들을 떠올려보네
열아홉 울음터는 어느 축대 밑이었지
그 울음은 축대처럼 가파를 스무살 때문이었지
해변의 어느 바위가 울기에 좋았지
한도 없이 밀고 오는 파도소리 때문은 아니었지
사랑이 그렇게 어찌할 수 없이 밀려온 때문만도 아니었지
늘 내 울음은 사사로운 것이었고
한번도 큰 울음을 품어본 적 없지
연암 선생 울음터를 가보고 싶네
나의 보잘 것 없는 울음터를 지나
광활한 그 울음의 넓이를 보고 싶네
하는 수 없이 지금 내 울음은
맨드라미 피어난 여름 뜰 앞에 두었네
뜰 모퉁이 봉숭아 그늘에 두었네
한 송이씩 한 송이씩 가꾸네
허나 어쩌나, 늙은 어머니는 그 앞에 더 오래 앉아 계시네
* * *
근대화에 실패하고 일본 식민지가 되었던 까닭에 우리는 과정을 다 거친후 그 결과로
'민주공화국'이 수립되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는 헌법의 전제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책이나 원론 속에만 갇혀
'민주공화국'에 값하는 민주주의 실현은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에도 계속 진행형이었습니다
3.15 4.19. 5.18, 6.10...
그 과정에서 많은 학생과 시민들의 희생이 있었고요.
이 세상 숱한 죽음들이 다 슬프지 않을 수 없지만, 특히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
그 중에서도 평범한 어머니였던 분들이 졸지에 생떼같은 자식들을 먼저 앞세우고 남은 일생을
투사로 살게되는 경우를 보게되면 참으로 마음 아픕니다.
'아이들 밥이나 챙겨주고 양말을 빨아주던 저 범부를 왜 이 시대의 투사로 거듭나게 했을까?'
" 도대체 누가????? "
김주열로 시작되어 , 전태일, 박종철 , 이한열...
그 어떤 대의 명분도 아들과 함께 평생을 살 수 있는 보상을 대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6.10 항쟁 30주년입니다.
20대 한열이가 살았으면 50대네요.
연세대 ' 한열동산' 추모식에서 어머니 배은심여사가 유족대표로 인사하고 있는 사진입니다.
" 그때도 최류탄이 없었더라면..."
그러네요. 김주열이나 이한열은 최류탄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허무하게 젊은 생명들이 스러지지 않았을테지요.
대학생들이나 그 반대편에 섰던 전투경찰 또한 다 이땅의 젊음들이었음에...
민주주의가 아직 우리보다 뒤쳐진 나라에서 군사독재 시절 집회시위의 무력진압 방법을 배워간다는 말
듣고 참으로 씁쓰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진화된 나라, 인격이 높은 유능한 정치지도자를 이제 우리도 만나 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 열망 이제 조금씩 가져봅니다.
자식을 먼저 앞 세운 엄마들, 아빠들의 울음터는 도대체 어디일까요?
사진출처: 한겨레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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