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정하해 고기를 굽는 저녁, 입술

생게사부르 2017. 1. 20. 00:15

정하해

 

 


고기를 굽는 저녁

 

고기를 굽는다, 종일 바깥을 다녀온 생애를 앉혀놓고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노동이라 적힌 퍼런 상추와

깻잎을 펼쳐, 구운 고기를 동여매는 입은 즐겁다 삐져낸 살점의 시간은 어디서 왔던, 이 저녁이면 나

는 피를 돌게 할 것이다 그 눈먼 것의 안위야 어떻든 다시 격렬하고 싶은 모의를 희망하는, 내 안으로

드는 구워진 눈망울과 울음을 기어코 잊는 저녁이다 삭은 내 분홍살에 먹이를 주는 일 결코 죄는 아

니지만 뉴스에는 또 한 사람 분신이란다, 거대한 석쇠 위에 살이 타는 저녁, 나를 견디

기 위해 너를 굽는다 한 사람의 결번으로 세상은 당장 그 부분만 안절부절, 마른 논에 물을 대듯 나는

계속 피를 대고 있다

 

유심. 2012.5-6호

 

 

 

입술

 

 

 

말이 다 빠져 나간걸 눈치채지 못했다

자음이 터질 때 모음을 닫을 걸 그랬나,

섬의 노란 부리를 지나 말이 필요 없는 곳으로 숨어 들었다

누군가 오백년간 심었다는 홑동백꽃이

제때 피어 참으로 입술 같다는 생각이 덥석 미치게 한다

 

나를 중심으로 화들짝 놀라는 저 입술들, 목젖마저 샛노래 묘하다

저것으로 섬을 매 만졌을 것이고

저것으로 바다를 들어 올렸을 것이고

말이 비어 불량해져 가는 내내, 속닥이는 바람과

정처를 만나는 아득함이라니

 

너라는 걸 남발 했던 지평의 저기

두고 온 몸이 아픈지 걱정이다

눈물겹게 한가하고 서럽게 무용지물인 달랑 그 입술 떠메고

샛노란 목젖을 들여다 보는, 어쩌면 동백의 문밖에서 이상하

통정이 하고 싶은  아주 슬픈

날이다

 

 

                  계간,<시와 소금> 2012. 봄호

 

 

정하해: 포항출신. 2003. <시안>으로 등단

시집: '살꽃이 피다' '깜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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