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의 기록/이웃지역 진주, 지리산 부근

함양 화림동 선비 길

생게사부르 2016. 12. 8. 14:47

경남 함양 화림동 선비 길

 

 

예로부터 좌 안동, 우함양이라

함양은 선비 마을답게 정자와 누각이 100여채 세워져 있다.

벗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학문을 논하거나 한양 길에 잠시 머물러 주먹밥을 먹던 곳이다.

 

서하면 화림동 계곡은 과거 보러 떠나는 영남 유생들이

덕유산 육십령을 넘기 전 지나야 했던 길목으로 예쁜 정자와 시원한 너럭바위가 많아 예부터

‘팔담팔정(八潭八亭 8개의 못과 8개 정자)’으로 불렸다.

현재는 농월정터-동호정-군자정-거연정을 나무다리로 이은 6.2㎞ ‘선비문화탐방로’(2006년 말 완공)가 만들어져

이전 선비들이 지나쳤던 숲과 계곡, 정자의 자태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다리를 걷다 정자가 보이면 잠시 쉰다. 정자 앞 크고 납작한 너럭바위가 작은들판처럼 펼쳐져 있다.

바위 이름은 얼마나 낭만적인지, ‘달이 비치는 바위 못 이란 뜻의 월연암(月淵岩)과

 ‘해를 덮을 만큼 큰 바위’인 차일암(遮日岩)이 풍광을 아우른다.

 

바위 위 물살이 움푹 파 놓은 웅덩이들에 물이 들어차 잔잔한 얼룩무늬를 이룬 모양이 신비롭다.

이 곳에 막걸리를 쏟아 붓고, 꽃잎이나 솔잎을 띄워 바가지로 퍼 마시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선비문화 운치의 극치를 오늘의 탐방객들도 따라 해 보기도 한다.

 

 

 

 

 

 

 

 

  

 

 

 

 

 

 

 

 

 

 

 

 

 

 

화재로 불 탄후 새로 지은 농월정과 아래는 불타기 이전 모습

 

 

 

 

 

 

선비길 탐방로

 

 

1998년 동학년 선생님들끼리 해남 땅끝 마을 강진에서부터 다산초당, 소쇄원, 식영정 코스를 돌았던 적이 있었다.

풍광 좋고 여름에 시원한 곳에 위치한 양반들의 거처를 돌았던 셈인데...조선 선비들의 학구적인 분위기를 느끼는 한편

 신분제 사회였던 그 시절에 살았더라면 양반이었을지 노예였을지를 생각 해 본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기억에서 불러 내 보면 농민, 그래도 자작농이었을 확률이 높은 것 같다.

마을 앞에 있던 논을 백부께서 좀씩 빼내 팔아서 나중에는 논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교사셨던 백부께서는 도시에서 생활하시면서 집 사고, 사촌들 대학 공부시키느라 논을 처분하셨다.

 셋째셨던 아버지께서는 늘 그점을 아쉬워 하셨고 나중에 조금씩 다시 되 사고 싶어하셨는데

교사 월급으로는 생계나 아이들 교육에 급급하셨고, 퇴직도 하시기 전에 병으로 돌아가셔서

그 꿈을 실행에 옮길 시간적 여유를 가지지 못 하셨다.

 

아무러하든 여자로 태어나서는 '공부' 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을테고 공부를 했더라도

집에서 문자정도 깨우쳤을라나 사회적 활동의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양반으로 태어나면 일단 먹고 사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넣지 않아도 되었을테니

'책 읽고 공부하는 일'에 매진 했을 것 같은 기분은 들었다.

조선 풍속화 생각이 났다. 추수하고 있는 옆에서 담뱃대 꼬나물고 감독겸 휴식하던 팔자 늘어진 양반,

 

 

 

김홍도 추수 

 

 

결론적으로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조선의 선비계급이 이끌었던 문화, 조선왕조도 불행하게 끝이 났지만

작금의 우리 정치 현실도 만만치 않다. 

폴리페서들이야 또 그렇다치고 대학교수들 중에도 학자다운 명예심이나 자존감 없이 권력과 금력에 줄서거나

휘둘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지조 있는 선비문화가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