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남강, 촉석루, 의암, 논개사당
촉석루는 남강(南江)에 접한 벼랑위에 자리잡은 정면 5칸, 측면 4칸 단층 팔작집의 웅장한 건물로
진주성의 주장대(主將臺)로 영남(嶺南) 제일의 누각이다.
조선시대부터 밀양영남루, 평양 부벽루와 더블어 우리나라에 3대"루樓"로 일컬어 진다.
고려 고종 28년에(1241년) 축성 당시 부사(府使) 김충광(金忠光)이 주도하여 창건하고, 장원루(壯元樓)라고 불렀다.
창건하여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는데, 1365년(공민왕 14)에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촉석루(矗石樓)로 명명되었으며, 용두사(龍頭寺)의 남쪽 돌벼랑에 위치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1593년 7월 29일 왜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이종인등이 이곳에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1593년 7월 제 2차 전투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벌일 때 논개가 촉석루 앞의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는 내력을 지니고 있다.
임진왜란 때 파괴 된 이후 1618년 조선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재건했다.
1725년(영조 1) 목사 안극효(安克孝)에 의하여 마지막으로 중수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6·25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60년에 재건하였다.
1747년 영조 23년 경상우병영으로부터 진주 사람이 남강 가에서 주웠다고 하는 도장 한 개가 조정에 진상되었다.
당시로부터 154년 전 최경회가 소지하고 있다가 남강에 몸을 던질 때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조는 이것을 창열사에 두고 제를 올리라고 명하고, 도장갑을 만들고 그 위에 글을 지어 촉석루의 의열을 칭송하였다.
追憶往事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百有餘年 1년여 년이 지났네.
幸得南江 다행히 남강에서 주웠던 도장에
印篆宛然 새겨진 전자가 완연하니,
矗石閫義烈 촉석루에서의 뛰어난 의열
想像愴先 상상하니 먼저 서글퍼지네.
命留嶺閫 영남의 병영에 보관토록 하여
以竪忠焉 충절을 기리게 하노라”
촉석루 앞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왼쪽으로 논개의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의기사가 있다.
1780년 정조 5년 다산 정약용은 19세에 부인과 함께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 장인 홍화보가 임지로 있는
진주에 들렀다. 장인은 촉석루에서 악공과 가인을 불러 사위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다산 정약용은 팔검무를 추는 가인에게〈무검편증미인(舞劒篇贈美人)〉이라는 시를 지어 헌사하였고,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지어 의기사에 걸게 하였다.
그 후 10년 후인 1791년 정조 15년에 30살의 나이로 진주목사로 있는 아버지에게 다시 들러서
〈재유촉석루기(再游矗石樓記)를 적었다고 한다.
촉석루 아래 계단을 통해 의암으로 내려갈 수 있게 작은 통로를 마련해 두었는데 중간 부분에 의암사적비가 있고,
그 아래로 남강이 흐르는 곳에 툭 튀어나온 "의암(義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1948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때 또 한번 소실되었으며, 지금 남아있는 것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새로 건축한 것으로 인간문화재 임배근이 공사 총책임을 맡았다.
촉석루는 본래 진주성의 남장대(南將臺)로서 전쟁이 일어나면 유사시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
또는 경상우도 군사들을 지휘하는 지휘본부로서 사용하였고, 또한 평상시에는 과거 시험 또는 향시를 치루는
고시장으로도 쓰여 장원루(壯元樓)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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