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선암사 낙엽들은 해우소로 간다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떨어질 때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왜 낮은데로 떨어지는지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시월의 붉은 달이지고
창밖에 따스한 불빛이 그리운 날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져 썩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한 잎 낙엽으로 썩어
다시 봄을 기다리는 사람을 사랑하라
해마다 선암사 낙엽들은 해우소로 간다
정일근
선암사 뒤간에서 뉘우치다
무위도식의 오후, 불식을 했다면 선암사 뒷간으로 찾아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녁 예불시간 뱃속 근심이 큰 장독에 고인 물처럼 출렁거려 뒷간에 앉는다. 사실 나는 내 죄를 안다. 그리하여 범종소리 따라 한 겹 한 겹 밀려와 두꺼워지는 어둠에 엉덩이를 까고 뉘우친다. 가벼워진 세상의 발들 殿을 돌아 장등(丈燈)이 밝혀주는 대웅전 앞 섬돌을 밟고 오를 시간, 나는 뒷간 무명 속에 발 저리도록 쪼그리고 앉아 진실로 뉘우친다.
내 죄의 반은 늘 식탐에 있다. 법고소리에 기름진 가죽이 함께 울고, 목어의 마른 울음 오장육부를 북북 긁고 간다. 운판 소리의 파편이 뼈 마디마디 파고들어 욱신거린다. 선암사 뒷간에 앉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근심을 버리자! 근심은 버리려 하지 말고 만들지 말아라. 뒷간 아래 깊은 어둠이 죽비를 들어 내 허연 엉덩이를 사정없이 후려친다. 마음을 비우자! 마음은 처음부터 비워져 있는 것이다. 나무 벽 틈새로 스며들어온 꽃샘바람이 주장자를 들어 내 뺨을 친다.
뱃속 근심이 우주의 근심을 만드는 저녁, 염주알 구르는 작은 원융의 소리에도 사방 십리 안 모든 봄나무들이 깨달음의 문을 열어 꽃 등불을 켜는데, 나는 내 몸의 작은 뒷문 하나 열지 못하고, 단 몇 푼의 근심조차 내버리지 못한 채 선암사 뒷간에 쪼그리고 앉아 뉘우친다.
* * *
오늘 주제는 '선암사 해우소(뒷간, 측간)'인데 정호승 시나 정일권 시 두 편 다 제목이 기네요.
전남 순천 승주읍에 소재한 선암사에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있는 뒷간입니다.
선암사는 들어가는 입구에 버티고 서 있는 목장승,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승선교 등 볼거리가 많은 정취있는 절집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뒷간(변소, 통시 측간)입니다. 절집 뒷간은 일반적으로 해우소(근심 푸는 곳)라고 적혀있는데
비해 선암사에는 처마가 합쳐지는 아름다운 합각의 곡선에 '뒷간'이란 글씨를 고어체로 쓴 푯말이 걸작입니다.
어느 절간이라도 이보다 더 아름다운 변소는 볼 수가 없다는 것,
뒷간을 돌아 뒤로 가면 단층이 아닌 이층으로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가운데 커다랗게 문이 나 있어
이곳을 통해 분뇨를 치워냅니다.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라면 부모로부터 타고 난 신체에 일부러 돈을 주면서까지 칼을대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는 시대
그러나 기실 인간의 삶은 그런 외형적인 아름다움 보다 잘 먹고 몸 기능 아무 이상없어 잘 움직이고,
화장실 가서 볼 일 시원히 잘 보면서 더불어 정신까지 건강 할 일,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라는 것
몸이 취하고 남은 냄새나는 배설물을 '더럽다' 고 기피하곤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서는
다른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
인간의 존재의 근원에 닿아 있는 부분을 합리적으로 해결한 선암사 뒷간은 인간세계의 아름다움이
다 부질없음을 알려주는 한 가르침입니다.
위 시 두편을 다시 잘 음미 해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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