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이정록 얼음도마, 코를 가져갔다

생게사부르 2016. 11. 30. 00:42

이정록


얼음도마



겨울이되면, 어른들은
얼어버린 냇물 위에서 돼지를 잡았다

우리동네에는 바다까지 이어지는 도마가 있었다
얼음 도마는 피를 마시지 않았다
얼어붙은 피 거품이 썰매에 으깨어졌다
버들 강아지는 자꾸 뭐라고 쓰고 싶어서
흔들흔들 핏물을 찍어 올렸다
얼음도마 밑에는 물고기들이 겨울을 나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노을을 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핏물은 녹아 내려 서녘 하늘이 되었는데
비명은 다들 어디로 갔나?)

얼음 도마위에 누워
버럭 버럭 소리를 지르는 돼지가 있었다
일생 비명만을 단련시켜온 목숨이 있었다

세상에,
산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이어지는 도마가 있었다

 

 

 

코를 가져갔다

 

 

 

누구나 죽지. 똥오줌 못 가리는 깊은 병에 걸리지. 어미

에게 병이 오는 걸 걱정마라. 개똥 한번 치워본 적 없다고

발 동동 구르지 마라. 지극정성으로 몸과 마음 조아리다보

면 감기가 올 게다. 감기가 코를 가져가겠지. 코가 막혀 냄

새만 맡을 수 없다면, 넌 내 사타구니에서 호박꽃이나 고

구마 밥을 꺼내 신문지에 둘둘 감쌀 수도 있을 게다.

 

 

  나 때문에 독감에 걸렸구나. 삼우제 지나면 씻은 듯이

나을 게다. 잠시 달아났던 코는 새것이 되어 황토 무덤 앞

에서 킁킁대겠지. 네 콧구멍에서 새봄이 시작될 거다. 그

게 회춘이란다. 가족이란 언제든지 코를 주고 받는 사이지.

새끼가 여럿이다보니 어미 코는 누가 베어간 것 같구나.

먼 훗날 너도 이렇게 말하렴. 잠시 코를 가져갔다가 돌려

주겠노라고. 곧 봄이 돌아올 거라고

 

 

 

 

 

 


'시로 여는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승유 휴일, 구조와 성질  (0) 2016.12.02
김종삼 시인학교  (0) 2016.12.01
이규리 흰 모습  (0) 2016.11.29
정선희 뱀을 신다  (0) 2016.11.29
이규리 꽃  (0) 2016.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