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유강희 정미소처럼 늙어라

생게사부르 2016. 11. 23. 14:20


유강희


정미소처럼 늙어라


나 늙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리
아직은 늙음을 사랑할 순 없지만 언젠가 사랑하게 되리
하루하루가 다소곳하게 조금은 수줍은 영혼으로 늙기를 바라네
어느 날 쭈글쭈글한 주름 찾아오면 높은 산에 올라 채취한 나물처럼
그 속에 한없는 겸손과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하늘의 열매 같은 그런 따사로운 빛이 내 파리한
손바닥 한 귀퉁이에도 아주 조금은 남아 있길 바라네
언젠가 어느 시골 마을을 지나다 잠깐 들어가 본
오래된 정미소처럼 그렇게 늙어 가길 바라네
그 많은 곡식의 알갱이들 밥으로 고스란히 돌려주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식은 왕겨 몇 줌만으로 소리 없이 늙어 가는
그러고도 한 번도 진실로 후회해 본 적 없는
시냇물 흐르는 소리도 반짝, 들려주는 녹슨 양철지붕을
먼 산봉우리인 양 머리에 인 채 늙어 가는 시골 정미소처럼
나 또한 그렇게 잊힌 듯 안 잊은 듯 조용히 늙어 가길 바라네


- 웹진 《문장》 2008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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