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의 기록/이웃지역 경남 이외 지역

여고동창 가을 나들이- 경북의성 고운사

생게사부르 2016. 10. 23. 21:56

여고동창 가을 나들이, 경북의성 고운사

 

 

20대 대구 있을 때 의성, 군위는 같은 경북이라도 친구나 연고가 없으면 갈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 시절, 대구에는 시외버스 터미널이 네 군데 있었습니다.

대구역에서 동차(기차)를 타면 세시간 걸려 마산에 올수 있었던 시절,

일년 정도 지나 구마고속도로가 만들어져 한시간 반 정도면 마산까지 오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서부 주차장으로 해서 101번 버스 타고 다닌 기억도 납니다.

 

경주양산 쪽은 동부주차장, 안동영주를 가려면 북부주차장을 이용했는데 그 시절은 안동까지도 참으로 멀었습니다.

그래도 안동 도산서원이나 영주 부석사, 희방사  소수서원은 학과 단골 답사지였습니다.

 

자취하던 집 아주머니가 그 당시 테니스를 치러 다녔는데, 테니스 코치가 비슷한 연배였습니다.

그 친구가 의성출신이라  의성이란 지명을 기억하게 되었지만 의성에 가 본적은 없었습니다.

 

여고 가을 나들이로 의성 고운사, 영주 무섬마을 병산서원이 잡혔습니다.

산행을 하면서 전국 여러 좋은 곳을 두루 다니는 친구가 여고 동창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곳,

하루 일정으로 친구들 무리없이 다녀 올 곳으로 장소를 선정했을 텐데 마지막에 병산서원이 조정이 되었습니다.

대형버스로 들어가기 어렵다보니 걸어갔다 와야하는데 시간이 부족 할 것 같아

진행사항을 보고 주변 적당한 곳을 다녀 오기로 변경을 했습니다. 

 

지난번 충주미륵대원지, 진남교반, 고모산성과 마찬가지로 동피랑에게 간단한 문화해설을 부탁해 왔습니다.

저는 어디 갈때 안 가본 곳은 예비정보를 찾아보고 가기에 별 걱정 안하고 있다가

프린트 잉크 토너 갈때가 됐는지 자료가 반 나오고 인쇄중단...이런 

무섬마을은 휴대폰 인터넷 찾아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출발 했네요.

 

 

 

 

' 고운사' 유래는 역시나 최치원 선생님이네요.

당시 '당唐' 나라 과거에 합격하고 '토황소격문'으로 그 문장을 널리 알릴만큼 학문이 뛰어났음에도 신라에 돌아와서는

6두품이라는 신분적 제약 때문에 당시 중앙(경주)에서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 할수 없었던 분입니다.

요즘식으로 하면 장관 자리에 등용이 못 되고(6두품은 신라관직 17등급 중에 12등급 밖에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지방으로 지방으로 나 돈 탓에 오히려 우리 지방 사람들은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최치원 선생님의 뛰어난 안목에 의해

이루어진 통치흔적이나 일상생활 장소들을 찾아다니며 그 분의 학문적업적을 돌아보며 존경심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고운사는 의성의 동북 끝단 단촌면 구계리에 ‘구름을 타고 오른다’는 등운산(騰雲山)에 위치 해 있습니다.

산의 서쪽 사면을 타고 흘러내린 산자락은, 반쯤 피어난 연꽃 형상을 이루고 그 꽃 속에서 물이 솟아

길고 부드러운 안망천(安望川)으로 흐릅니다. 그곳 꽃 핀 자리, 천(川)이 시작되는 자리에

681년 해동 화엄종의 시조이신 의상대사가 절을 짓고 고운사(高雲寺)라 이름했습니다. 

부용반개형상(연꽃이 반쯤 핀 형국)의 천하명당에 위치한 이 사찰은 원래  ‘높은 구름’ 이라는 뜻의 高雲寺였으나

최치원이 선생이 여지ㆍ여사라는 대사와 함께 가운루(경북 유형문화재 제151호)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후

'고독한 구름’을 의미하는 고운사(孤雲寺)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계곡은 대부분 메워져 옛 풍취는 없지만 지금도 누각에 오르면, 서쪽 하늘가에 걸린 등운산 봉우리가

무지개 섬처럼 보이고 가운루는 그곳을 향하는 대해의 배처럼 느껴집니다.

가운루의 원래 이름이었던 가허루와 우화루는 도교 사상이 담긴 이름으로 고운이 품었던 이상세계로의 간구가

깃들어 있다고 보여집니다. 가질 수 없으면 간절함이 더 깊었을까요?  ‘높은 구름(高雲)’을 뜻하던 고운사(高雲寺)가

고운 최치원 선생이 거쳐간 뒤 그의 자(字)를 따서 ‘고독한 구름(孤雲)’의 고운사(孤雲寺)가 되었으니까요.

 

 

 

 

 

 

 

 

부드럽게 곡진 굵은 기둥이 각기둥의 협시를 받으며 육중한 지붕을 가뿐히 이고 있는 속에 아직 가지를 뻗을 것만 같은

처마를 나무기둥들이 살짝 떠받치고 있는

'조계문'이라 적힌 일주문이 아주 예술작품입니다.

 

일주문 속에 오롯이 보이는 천왕문, 사천왕이 눈을 부라리는 좁은 문을 지나면 오래된 석불들을 봉안해 놓은

작은 고불전 위로 커다란 가운루(駕雲樓)가 출항하는 배처럼 서 있습니다. 그 뒤를 우화루(羽化樓)가 따르고 있고요.

 가운루, 현판 중 누각 바깥 처마에 걸린 행초서 글씨는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습니다.

 

 

 

 

 

왜란 당시 승병활동의 공간이기도 했던 가운루는 지붕 옆면이 여덟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의 중층 누각으로

1982년 2월 24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가운루의 원래 이름은 가허루(駕虛樓)였습니다. 누각이 계곡을 가로질러 다리처럼 놓여있어 길고 가는 기둥들이

커다란 몸체를 떠받치고 계곡을 가로질러 그 모습이 마치 둥실 뜬 배처럼 보이는데 

 ‘누각에 서면 아래로는 계류가 흐르고, 뒤로는 찬란한 산들과 구름의 바다를 접하는 신선의 세계’라 불리기도...

 

우화루에도 특이하게 현판이 두 개 달려 있는데 밖에는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된다’는 도교적 의미의 우화루(羽化樓)

 현판이 보이고, 누각 안에는 ‘꽃비가 내린다’는 뜻의 우화루(雨花樓) 현판이 있습니다

 

 

 

가운루(가허루)

 

 

 

 

 

 

 

 

범종, 목어, 운판, 법고가 놓여 있는 종각

 

불교의 법전사물은 법고(法鼓),목어(木魚) ,운판(雲版),범종(梵鍾)등 불교 의례에 사용되는 의식용 법구로

아침과 저녁 예불의 진행중 종소리에 이어 울리며 우주구성의 4대 요소인 지(地)수(水)화(火)풍(風)을 상징합니다.

즉 법고는 땅을, 목어는 물을  범종은 불을, 운판은 바람을 각각 상징하며 법고는 축생(네발 가진 길짐승)

목어는 물속에 있는 중생을, 운판은 조류나 허공에 떠도는 영혼을

범종은 대중들, 지옥의 중생까지 영혼을 제도한다는 상징성을 가집니다.

 

 

 

 

 

 

 

 

우화루 곁의 종각을 지나면 고운사의 중심 법당인 대웅보전으로 1992년에 신축한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장쾌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웅보전의 왼쪽은 극락전, 뒤쪽은 약사전, 오른편 돌계단을 오르면 나한전이 위치 해 있습니다.

 

극락전은 대웅보전이 신축되기 전까지 고운사의 큰 법당 역할을 하던 곳으로 종일 바라보아도 좋을 단아한 기운으로 가득합니다.

은근히 숨은 듯한 나한전은 조선 중기의 건물로 앞에는 상처가 많은 삼층석탑이 서 있고

그 아래로 전각의 지붕 선들이 천년이 훨씬 넘는 시간을 순순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1963.01.21 보물 제246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 (義城 孤雲寺 石造如來坐像)은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갖추고 있으며, 손상이 거의 없는 완전한 불상입니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끝이 날카로운 배(舟) 모양이며 머리광배와 몸광배에는

연꽃과 덩쿨무늬 등을 표현하였고, 가장자리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표현

 대좌는 상·중·하대로 이루어졌는데, 상대석은 연꽃을 위로 떠받드는 모양으로 표현되었으며

 8각의 중대석은 모서리를 기둥 모양으로 장식하였고, 하대석은 연꽃잎을 엎어놓은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머리, 얼굴, 신체, 옷주름, 대좌, 광배 등에서 8세기의 불상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9세기의 특징적인 양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약사전의 석조여래좌상과 나한전 앞의 삼층석탑(경북 문화재자료 제28호)은

신라 헌강왕 도선국사께서 조성하신 것들이며 

특히 고운사는 해동제일지장도량이라 불리는 지장보살영험성지입니다.

 

약사전에서 스님이 불경을 외고 계셔서 방해 될까봐 석조여래좌상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니래도 모처럼 여고 동창들이 여고시절 분위기 내며 우루루 몰려와서 수행하시는 스님 방해될까봐

신경이 좀 쓰였습니다. 수행하시는 분들은 그런 분위기도 다 초연히 떨쳐야 하겠지만요. 

 

 

 

 

 

 

 

 

 

 

 

 

 

 

 

 

 

 

 

 

만세문으로 들어가면 '연수전' 있는데 1774년 영조가 내린 어첩을 봉안하던 건물이며

현재 건물은 1887년에 중수된 것입니다.

 

 

경내의 가장 깊은 곳에 명부전이 자리합니다. 약 300년 전에 세워진 법당으로 내부에는 사후에 인간이

심판받는 장소가 형상화되어 있는데, 미래불이 오시기 전까지 중생의 모든 고통을 구원하신다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염라대왕을 비롯한 열 대왕과 그 권속들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명부전은 사자에게 길을 안내하기도 하지만 살아있을 때 자신의 뒤를 돌아보고 사후의 길을 닦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옛부터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느냐고 물었다고 하는데 지장보살님의

원만자비하신 풍모는 물론이거니와 명부십대왕의 상호와 복장도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위엄과 정교함을 자랑합니다.

 

 

 

 

명부전이 다른 절들에 비해 규모도 크고 천왕문에나 계실법한 금강역사 같은 상이 여럿 자리를 잡고 있어

내부가 빽빽하고 묵직한 느낌이 들었고 여기도 스님이 수행중이어서 살짝 들여다 보고 물러섰습니다.

 

 

고운사는 통일신라시대 창건 이후,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이자 풍수지리사상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도선국사가

가람을 크게 일으켜 세웠으며 그 당시 사찰의 규모가 五法堂 十房舍(5동의 법당과 10개의 요사채) 가 있었다고도 합니다.

 

 948년(고려정종 3)과 1018년(현종9)에 중창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이곳을 승군의 전방기지로 사용하여

 식량을 비축하고 부상한 승병들에 대한 뒷바라지를 해준 곳이기도 합니다.

 

석학으로 이름 난 함홍선사가 이곳에서 후학을 지도할 때는 무려 500명의 대중스님이 수행하기도 했고

사세가 번창했을 당시에는 366간의 건물에 평균 200여 대중이 상주했던 대도량이었으나

해방이후 쇄락하여 많은 사찰재산이 망실되고 지금은 이십여명 대중이 상주하는 교구본사로는

작은 규모의 사찰입니다.  

사찰 건물은 1835년에 소실된 것을 만송대사, 호암대사, 수열대사 등이 중창했고

1970년대에 건물 일부가 다시 소실되었으나 10여년전부터 중창불사의 낡은 건물들을 수리하고

단청을 손질하고 있습니다.

 

 

고운사를 찾으면 두 가지를 꼭 하라고 하네요.

 첫째는 우화루와 극락전 사이에 스님들의 공간인 만덕당을 찾아' 등운산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만덕당 툇마루에 앉아 눈앞에 보이는 등운산 봉우리, 그것은 꽃비 내리는 세계와 극락의 세계에 걸쳐 있다는데

잠시 둘러보고 가는 관광객으로서는 어려운 일입니다 .

 

둘째는 요사채 공양간 입구에서 ‘호랑이’를 만나야 하는 일입니다.

 조선 중기에 그려졌다는 호랑이 그림이지만 금세라도 큰 돋움을 해 덮쳐올 것만 같은 형형한 눈빛이며

 어느 쪽으로 달아나도 호랑이의 시선이 살아서 쫓아온답니다.

차에서 친구들에게 고운사 설명을 하고 난 이후 친구들이 가장 궁금한게 호랑이 눈이었나 봅니다,

' 그 호랑이 어디 있냐'고 제일 많이 물었거든요.

 

 

 

 

 

 

 

 

 

 

 

고운 최치원선생은 신동 또는 천재, 또는 신라 최고의 지성이라 일컬어지는 인물입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고운은 12세 때인 868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6년 만에 과거에 합격했고,

여러 벼슬을 지내며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습니다.

875년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동양)세계의 중심은 당나라였으니 요즘으로 치면 미국에서 이름을 떨치는 학자가 된거라고 해석하면 되겠지요

 885년 귀국한 그는 의욕적으로 일했지만 신라 말이라는 어지러운 상황과 신분제라는 견고한 벽에 좌절하고 맙니다.

 결국 고운은 42세 즈음 관직을 버리고 세상을 떠돌다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지며

고운사의 가운루와 우화루 역시 그가 세상을 유랑할 적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산 해운대, 마산 경남대 맞은 편의 월영대, 해운로 고운로 하는 명칭이나 함양 상림의 흔적 역시

 최치원 선생과 관련한 흔적들입니다.

 

마산에서 매미 태풍으로 사상자가 발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닷물이 매립지를 넘어서 경남대 앞에까지 밀려 들어왔는데 옛 기록에 의하면 거기가 바닷가여서

최치원 선생님이 제자들과 바닷가에 앉아 학문을 논하기도 했다고도 하고

함양 역시 방풍림으로 나무를 심은 곳이 상림으로 천년이 지남 지금도 함양의  문화공간, 체육시설이 집중되어

함양사람들의 중요한 생활공간이자 전국에서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곳이 되고 있습니다.

 

최치원 , 정약용 같은 분들은 정말 훌륭한 학자이자 훌륭한 관리였다는 것은 그 흔적지를 찾아 다니다 보면

절실히 체험 할 수 있습니다. 학문이 높고 그 학문적 역량을 목민관으로 제대로 발휘하면

이렇게 후세에까지 좋은 영향을 남기건만 

에휴~

 

여담이지만 마산에서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경남에서 홍준표 표줘서 도지사 만들어 놓고

성남으로 이사가서 혜택보는 사람들 제일 얄밉다는...

 

우거진 송림에 아기단풍이 어우러진 숲은 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청정하며

 고운사 초입에는 다른 절 주변같은 번다한 사하촌이 없습니다.

대신 사찰음식체험관, 화엄승가대학원, 노인 요양병원 등이 숲속에 자리하며 최치원 문학관을 만들고 있다

고 합니다. 템플 스테이와 사찰음식 체험은 매우 유명하며 된장, 고추장 등 장류를 구입할 수 있답니다.

 

여고 친구들과의 가을 나들이 첫 목적지 의성 고운사를 보고 내려 오는 길,

도로변에서는 주렁주렁 붉은 사과들이 단풍마냥 달려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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