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의 기록/이웃지역 경남 이외 지역

문경 고모산성, 진남교반

생게사부르 2016. 4. 30. 23:43

문경 고모산성과 진남교반

 


고모산성( 2C~4C 신라에서 쌓은 성) 명승 31호

 

 

고모산성은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고모산(姑母山)에 있는 포곡식 산성으로 본성 1,256m, 익성 390m를 합해

총 1,646m에 달합니다. 산성으로 서벽은 사방에서 침입하는 적을 모두 방어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며

최초 축조연대는 2세기 말경에서 신라가 영토확장에 열중하던 시기인 4세기 말까지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고모산성에서는 경북팔경 중에서도 제일의 풍광으로 손꼽히는 진남교반(鎭南橋畔)을 조망 할수 있는 

장소로 주변 산야의 숲이 울창하고 푸른 강물이 흐르는 영강 위로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듯한 층암절벽,

철교, 옛 다리, 새로 놓은 다리가 나란히 하고 있어 자연과 인공 요소가 잘 조화된 풍광을 볼수 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전해온 천연의 요새인 고모산성은 영남대로 옛길에 속해 있으며 고모산성과

토끼비리(토끼벼루의 사투리로 벼랑길)를 중심으로 진남교반 위의 절벽을 넘어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의 소원과 집념을 느껴 볼수 있는 흔적입니다.

 

 

서쪽과 남쪽은 영강이 감싸고 있고 동쪽에는 조정산(810m)에서 뻗어내린 험한 산등성이로

서쪽은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여 바깥쪽만 쌓는 편축식(片築式)으로, 나머지 삼면은 지세에 따라

성벽 안팎을 쌓는 협축식(夾築式)으로 성벽을 쌓았습니다.

 

 

 

 

 

 

 

 

* 고모산성의 서문지 *

고모산성 서문지는 진남휴게소 북단에서 산성내로 오르는 소로길이 개설되어 있던 곳으로

성외에서 가장 쉽게 진입할 수 있는 지점이며 부근 지하에는 약 1,500여 년 전의 요새로 짐작되는 목조 건축물과

유물이 매장되어 있다고 하며 이 목조 건축물은 남북 길이 12.3m, 동서 길이 6.6~6.9m, 높이 4.5m 규모의 3층 구조

(상층 2.1m, 중층 1m, 하층 1.4m)로, 창고나 지하 요새, 저수지 등으로 사용된 것으로 짐작됩니다.

 

 

남문지는 성내로 진입하는 정비 도로가 있던 곳이며, 동문지, 북문지와 성벽을 볼 수 있고,

곡성 및 치성, 수구, 연못지도 있으며, 성벽을 따라 가다보면 영남대로 옛길로 갈 수 있게 됩니다.

 진남문을 지나 성벽 안쪽으로 가면 최근 복원한 주막거리가 있으며 고모산성을 중심으로 주변에

고부산성, 마고산성, 희양산성, 조령산성 등 많은 산성이 위치하고 있고 연이어 있는 영남대로의 험로인

토끼비리와 함께 명승지로 얘기되고 있습니다.

 

 

 

 

 

고모산성, 진남 교반의 경관은 서남쪽 영강, 북쪽 월악산, 넓은 평야, 높은 지형에 절벽을 두고 있어서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상대하기 좋은 천연요새이자 철옹성이었으며

신라 신현리고분군이 있어 당시 지배계층의 주거 했던것으로 짐작되는 흔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을 복원했고, 서문계곡에는 오래된 성벽과 배수구 흔적이 남았고

북쪽 성벽은 오랜 세월동안 대부분 무너졌으나 30M 이상 일부 원형이 유지된 채 남아 있습니다

영조 이인좌의 난을 거쳤고, 의병장 이강녕이 이 성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산성전체 길이는 1.6KM로 왜군 방어를 위해 조선시대 쌓은 400M의 석현성까지 연결됩니다.

 

영남대로 구간 통행이 빈번했던 탓에 오래 전부터 주막거리가 형성되었고

 마지막 주막을 원형대로 복원한 영순주막, 삼강주막의 옛 주막이 남아 있으며

요즘 수능치를 때 찹쌀 떡을 선물하듯이 선비들이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먹어야 했다던 꿀떡고개,

과거치러 가던 선비가 머물면서 인연을 맺기도 했던 낭자를 과거 합격하고 잊어버리고 있다

원한을 사서 죽어 뱀이된 처녀가 과거 치러 가는 선비들에게 해꼬지를 하기도 해서 성황당을 지어

그 넋을 달랬다고 하는 전설도 전해집니다.  

 

 

 

 

 

 

 

 

 

 

 

 

 

 

 

 

 

 

부산 동래에서 서울에 이르는 영남대로 중 가장 험하다는 토끼비리.

영남대로는 과거 한양과 동래를 이어주던 도로 중 가장 넓고 짧은 길이었습니다.

지금의 경부고속도로보다 무려 100여 리 이상 짧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거의 없으나

그 원형을 토끼비리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곳도 20세기 초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폐도가 되어버렸지만요.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려를 세운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전투를 벌이다가 남하하는 도중에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수직의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절벽 앞에 이르러 군사들이 길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

마침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기에 그 토끼를 쫓아가니 험하기는 했지만 길을 낼 만한 곳이 나타났습니다.

 토끼가 지나간 벼랑을 잘라 길을 내고 왕건은 힘겹게 진군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비리’란 ‘벼루’의 사투리로 강이나 바닷가의 낭떠러지를 의미하는데

 이 길을 ‘토천(兎遷)’이라 부른 데서 토끼비리란 말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문경 가은에서 내려오는 영강과 문경새재에서 흘러오는 조령천이 합류하는 곳에서부터

S자형으로 산간 협곡을 파고돌면서 동쪽 산지에 형성된 벼랑에 가까스로 깎아 만든 길인셈입니다.

영강의 하천변 절벽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조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벼랑길을 잔도라 하며 길이는 약 2km에 달합니다.

 

석현성의 진남문 아래에서 축조된 성벽을 따라가면 오정산과 영강으로 이어지는 산의 경사면에 다다르게 되며

 거의 수직절벽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에 겨우 한 사람 정도가 지나갈 수 있는 좁고 험한 길이지요.

‘관갑천잔도(串岬遷棧道, 관갑의 사다리길)’라고도 하는 이 길은 조선시대 주요 도로였던

영남대로의 한 구간을 이루고 있는 특별한 옛길로 잔도였습니다.

잔도(棧道)는 험한 길이란 뜻으로 보통 절벽을 파내고 건설한 벼랑길이나 사다리길인 경우가 많은데

땅이 넓고 다양한 민족들이 삶의 일상을 꾸리고 있는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경사가 급한 곳에 험한 길을 많이 만들어

지금도 ' 세상에 이런 ~' 하는 TV 프로그램에 한번 씩 소개되기도 합니다.

 

 토끼비리의 벼랑길 노면 위에는 우리 선조들이 드나들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동안 바위의 표면이 닳고 닳아 돌길이 반질반질한 모양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어 그 옛날 이곳을 왕래했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조들의 발걸음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것이지요.

 

 

 

 

 

영강의 수면에서 10~20m 위의 석회암 절벽을 깎아서 만든 토끼비리는 세 가지 공법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첫째 구간은 경사가 매우 심한 암벽 지역으로 석벽을 깎아낸 후 토석을 다져 노면을 평탄하게 만들었고,

토석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 축대를 쌓아 길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간 구간은 벼랑이 가장 가파른 지역으로 바위를 절단하여 길을 낸 흔적이 뚜렷하며

잔도의 폭이 갑자기 좁아지는 위치에는 축대를 쌓아 길의 폭을 넓히기도 했습니다.

길 가장자리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나무로 만든 난간을 설치하여 길을 억지로 넓힌 흔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고 하네요.

 

그 다음 구간은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 고갯마루를 형성하는 곳으로 암맥이 돌출한 부위는

인공으로 암석을 깎아 말의 안장과도 같은 암석안부(巖石鞍部)를 만들었다고 해요.

이곳은 영남대로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석벽을 깎아 만든 잔도 구간에 새롭게 사다리길을 개설하여 탐방객의 통로로 활용하고 있답니다.

 

문경은 영남에서 중원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한 고을로 하늘재, 새재를 비롯하여 근대에 차도로 개설된

이화령까지 여러 개의 고갯길이 자리합니다. 또한 고모산성 아래에 이르면

길이는 그다지 길지 않지만 토끼비리와 같은 험로도 위치하고 있어 물과 산과 계곡을 건너 계속되는 하나의 긴 노선입니다.

평지를 지나고 높은 산을 넘고 시원한 들을 만나고 아름다운 계곡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길에서 가장 필수적으로 전제는 반드시 끊기지 않고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보면

토끼비리와 같은 잔도는 길의 연결이라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날은 단체로 인원이 많아 토끼비리 길로 걸어 보지는 못했고

지금 한창 정비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