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고영민 앵두 허밍, 허밍

생게사부르 2016. 10. 13. 15:46

앵두 / 고영민


그녀가 스쿠터를 타고 왔네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그녀의 스쿠터 소리는 부릉부릉 조르는 것 같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고
흙먼지를 일구는 저 길을 쒱, 하고 가로 질러왔네
가랑이를 오므리고
발판에 단화를 신은 두 발을 가지런히 올려 놓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기린의 귀처럼 붙어 있는 백미러로
지나는 풍경을 멀리 훔쳐보며
간간, 브레끼를 밟으며

그녀가 풀 많은 내 마당에 스쿠터를 타고 왔네
둥글고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허밍, 허밍


해 질녘 저 밭은 무엇인가
해질녘 저 흐릿한 논길은
해질녘 밭둑을 돌아 학교에서 돌아오는 거미 같은 저 애
들은 무엇인가

긴 수숫대
매양 슬픈 뜸부기 울음

해 질녘 통통통 경운기의 짐칸에 실려가는
저 텅빈 아낙네들은 무엇인가
헛기침을 하며 걸어 오는 저 굽은 불빛은 무엇인가

해 질녘 주섬주섬 젖은 수저를 놓는

수레 국화 옆에서 흙묻은 발목을 문지르는 저 고단함은
해질녘 내 이름 석자를 적어 온
이 느닷 없는 통곡은 무엇인가

해질녘, 해직녘엔
세상 어떤 것도 대답이 없고
죽은 사람은 모두 나의 남편이고 아내이고
해직녘엔 그저 멀리 들려오는
웃는 소리, 우는 소리

허밍, 허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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