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문태준, 시월에

생게사부르 2016. 10. 12. 08:04

시월에


문태준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 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헤죽, 헤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 아래로 흔들리며 따라 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 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돈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     *     *


텅 비어 있음이 꼭 비어 있음이 아닌
비어 있음 안에는 비어 있음의 쓸쓸함과 풍경과 느낌이 들어있음
비어 있음과 채워져 있음을 함께 느껴서 좋은 만큼
지극히 쓸쓸하기도 한,

시월에도 어울리고 11월에도 어울릴 시
텅 비어가는 시기, 시절,
덜어내고 비워내고 털어내야 할 때가 오고 있음을 안다. 우리는,
그러기에 풍성함에 더욱 감사하고, 사그라 드는 것이 더욱 애잔하다.

시월의 운명에 처한 대상들, 시든 오이든 꽃빛이든 상실해 가는 것들
뭔가 다 사라지고 있구나.
이미 상실을 경험 할 만큼 다 했기에 그 상실을 더 절절히 느끼고 있을 터,

시월은 원래 쓸쓸한 계절이기에 이 시기의 혼자는 더 쓸쓸 할수 밖에 없음에도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서 찬 밥을 물에 말아 먹는 시인의 쓸쓸함

역으로 생각하면 아마 시월부터 사람의 온기가, 더 필요해지는 시기라는 뜻 일거다
가족이든 연인과의 사랑이든...


나민애 평론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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