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두고 나왔다/한영희
엄마를 두고 나왔다
집에서 한참을 멀어진 후에야 깨달았다
손 안에 들어 있어야 할 엄마 손이 보이질 않았다
봄이 온 것 같았는데 꽃이 보이질 않았고
비가 온 것 같았는데 물 웅덩이가 고이질 않았다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를 최대한 느리게 걸으며
엄마와 화분은 얼마나 다른가 하고 생각 했다
소파에서 식탁으로 침대로 화장실로 화분을 자꾸 옮겨 놓았다
시들어 버린 엄마를 어떻게든 회복하려고 했지만 화분은 죽고 말았다
엄마, 나도 엄마야
엄마가 하기 싫은 엄마야
벤치 같은 데다 흘려 놓고 깜빡한 우산처럼 시시해져버린
집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지갑 속에 넣는 걸 깜빡한 동전들이 가방 속에서 짤랑댔다
걸을 때마다 엄마, 엄마 부르는 것 같아
목이 자꾸 말랐다
세탁소에 걸린 셔츠들 사이에서 엄마 원피스를 보았다
슈퍼마켓 앞에서 식료품을 고르는 파마머리 엄마를 보았다
철물점에서 모종삽과 퇴비를 사는 엄마 손가락을 보았다
그러나 가방 속을 아무리 뒤져도 보이질 않았다
생수 한병을 사는 나는, 결코 엄마가 아닌 나는
어, 지갑 두고 나왔다
계산대 옆에서 훌쩍 자라난 딸이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엄마는 어디에 가 있는 거야 ?
한영희 1979.경기광명
2016. 제 16회 창비 신인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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