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의 기록

진실의 승리, 드레퓌스 사건에서 한수 배우기 (1편)

생게사부르 2016. 9. 10. 01:20

진실의 승리, 드레퓌스 사건에서 한수 배우기 (1편)

 

 

 

백년이 더 된 먼 유럽의 프랑스에서 일어 났일,

평범했던 프랑스의 유태계 청년장교 ' 드레퓌스'는 본인이 전혀 의도치 않았음에도

운명처럼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오늘날 '진실'의 대명사 되었을까?

 

'드레퓌스 사건'은 지금 이 시점 우리사회에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국정교과서, 사드배치, 세월호 청문회...숨기고 감추고, 방해하고...반대 집회를 하면 그 맞은 편에서

맞불집회를 하는 어버이 연합, 엄마부대, 일베, 뒤에서 조종하고 지원하는 숨은 세력

정권편에서 나온 부정부패나 비리는 숨기고 감추고, 증거가 다 드러난 것들도 이핑계 저핑계

여유를 주는 사이 흐지부지 되고, 면죄부를 주고

'적'이다 싶으면 어찌 그리 신속히 움직여 일사불난하게 일처리를 밀어부치는지

 

인생의 2/3를 건너오면서 가장 화나게 하는 일이 무엇이었을까 되돌아 보면 '거짓'이

 '참'이 아닌 일에 시간과 노력을 쏟도록 강요하는 일들이었다.

일회적인 삶, 백년도 못다 사는 인생살이에 '참'으로 살아도 아쉬울 터에 '거짓'으로 살라니...

 

' 학교도 사회 속의 한 공간'이니 아이들을 교육하는 학교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권을 홍보하고, 정권이 필요한 교육정책을 위해 혹은 자신의 승진과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곳에서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교육을 한다는 것 자체가 교육기관에 의해 방해 받는 어이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나 할까

학교현장에서 '교육부가 없어져야 우리 교육이 산다' 는 얘기는 비밀도 아니었다

 

드레퓌스 얘기는 '대다수 인간들이 진실되게 살고 싶어하고 세상도 그렇게 돌아가기를 바란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우리일제 식민지 청산을 못하여 사회정의가 실종되고 공적인 다수 합의가 아니라 민족을 배신했던 친일세력들이

그대로 사회의 기득권이 되어 흘러 온 결과 거짓과 사기와 부정부패가 주류처럼 되면서 불행한 죽음들이 많고

정직하게 양심적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되려 피해를 보게되는 불합리

 

시민혁명이 일어난 나라, 프랑스에서도 이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마치 내전처럼 편이 갈려 사회혼란을 겪었다

진실과 거짓, 기득권적인 보수와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어 결국 진실은 밝혀진다.

물론 십년 이상이 걸렸지만...

 

오늘 날 우리 사회가 회복하고 지켜 나가야 하는 '진실'은 무엇일지, 무엇이 ' 거짓'이고 가짜인지를 가려내고

청산하려는 시민의식이 '대한민국 '호를 한단계 선진국으로 올려 세울 것으로 믿는다.

 

 

001. 드레퓌스사건-진실의 승리와 더불어 영원한 이름

 

유시민이 쓴 거꾸로 읽는 세계사(1999. 푸른 나무, 개정판 2004)에서 드레퓌스 사건의 표제이다.

그 외에도 피의 일요일,러시아 10월 혁명과 미완 의 혁명 4.19 등

 

그 당시까지 가르쳐 왔던 기존의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색다른 시각에서 평가한 책으로 그 당시 지식층이

애독하던 교양역사서였다

 

그 당시 나는 사십대 나이에 들어섰지만 대학생이었던 내 동생들이 읽었고, 스승의 날 찾아왔던 고등학생 제자들이 읽었다 

네루의 '세계사 편력'하고 두권을 사서 돌려서 읽도록 선물로 준 기억이 난다 .

그런 점을 생각하면 지금 필진도 밝히지 못하는 '국정 역사교과서'는 권이 바뀌면기될 가능성이 높다.

 

'진실'이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한 사람의 주관적 감상이 아니며 '진실은 언제나 자신을 드러 낼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말처럼 어떤 계기를 통해 세상에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있고, 그것이 역사의 평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년도 더 된 드레퓌스 얘기는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되새겨봐야 할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20세기를 연 진실의 승리 「 드레퓌스 사건」

1. 알프레드 드레퓌스 간첩이 되다

1894년 9월 프랑스 육군참모본부 정보부요원이 독일대사관 슈바르츠 코펜 앞으로 가는
군사기밀 “명세서”를 입수했고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대위가 간첩혐의로 체포
되었다. (그 이유는 명세서에 쓰인 필체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독일과 국경지역이던 알자스로렌 지방에서 성장했는데 이 지역은 철 등 지하자원이 있어

독일, 러시아의 틈바구니에서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지역이며 여기를 두고 영토싸움이 심했다.

드레퓌스는 프랑스 군인으로써 조국이나 군대에 대한 충성심이 있었고, 진지하고 성실했지만 융통성이 다소 부족한

청년장교였는데 범인으로 몰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유태인’이라는 점이었다

(나중에 밝혀 진바에 의하면 정작 본인은 자신이 유태인이라고 생각 해 본 일이 없다고 한다 )

유태인을 박해한 유럽사회의 뿌리 깊은 악습은 군대 등 보수집단과 반유태주의 신문사 등에 의해 이미 재판을 받기도 전에

언론의 여론몰이에 의해 프랑스 군사정보를 독일에 팔아 먹은 반역죄인으로 기정 사실화 된 것이다


2) 거짓이 판치는 재판

1894.12 군사법원의 비밀재판에 의해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는데 드레퓌스를 유죄로 만들기 위한 여러 가지

거짓증거가 제출되었다.

반유태주의 신문은 ‘ 드레퓌스가 프랑스를 파멸시키고 프랑스 영토를 차지하려는 유태인 국제조직 스파이’므로

사형시킬 것을 주장하는 여론몰이를 하였고
이에 반해 양식 있는 일부언론인 변호사들은 확실한 증거를 밝히기를 요구하였다.

육군참모본부는 ‘ 확실한 증거는 있지만 국가안보를 위해 공개 할 수 없다. 중요한 군사기밀이라 공개하면

독일과 전쟁을 일으킬 각오를 해야 한다’고 협박성 위협까지 하게 된다

드레퓌스는 유죄로 판결나 종신형 선고를 받았으며 계급장을 뜯기고 군대에서 쫒겨 나는 모욕을 당 한 후

아프리카 기아나 적도부근 외딴섬의 돌 감옥에서 스물 네 시간 감시를 받고 밤에는 두 겹으로 된 쇠사슬을 차고

짐승 같은 취급을 당하는 수형생활을 시작하였다.
일시에 한 가정이 무너졌고 아내 루시는 남편과 같이 ‘악마의 섬’에서 살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가 거절당하였다.

 

 

드레퓌스                                         에밀졸라

 


1896년 3월 참모본부 정보국의 조루쥬 피카르중령이 또 다른 스파이 사건을 조사하던 중, 드레퓌스 대위가 반역죄를

범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고, 문제가 된 명세서 글씨가 보병대대장 ‘에스떼라지’ 소령 글씨임을 알아내게 되었다.

책임의식과 올곧은 양심을 지닌 피카르 중령은 에스떼라지를 체포해서 다시 재판을 열자고 건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참모본부 장군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드레퓌스 사건을 그대로 묻어버리고 싶어했다.

(이미 이 시점쯤 되면 사건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고 자신들의 잘못을 덮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은폐하려는게

일반적인 현상이며 하나의 진실을 덮어버리기 위한 수십가지 수백가지의 거짓들이 판을 치게된다.

또 진실은 미사여구가 필요 없지만 거짓일수록 더욱 화려하고 그럴 듯하게 치장이 되므로 일반인들은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능력이 일시적으로 흐려져 오해를 하기도 하지만 진실은 오로지 하나고 거짓은 여러가지이기 때문에 나중에

그 거짓과 거짓이 부딪쳐 스스로 거짓으로 드러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피카르중령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변호사, 국회위원에게 그 진실을 알리나 이들은 사실을

인지하고도 ‘ 유태인과 한 통속’이라는 비난을 감당 할 수 없어서 사건이 계속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동생의 무죄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형 마티외는 신문에 다음과 같은 속임수 기사를 싣는데 성공했다.

“반역자 드레퓌스의 죄를 증명 할 수 있는 뚜렷한 증거가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밝히지 않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아직도 드레퓌스가 죄가 없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는 만큼, 지금이라도 그 증거를 공개하는 것이 좋겠다”

한편 부인 루시는 남편이 군사법원에 제출된 증거서류를 보지도 못한 채 유죄판결을 받았으니 재판을 다시 받게

해 달라는 의회청원을 하게 된다

드레퓌스와 유태인을 욕하고 헐뜯는데 앞장섰던 신문 「르마탱」이 “ 드레퓌스 범죄를 입증하기위해”

문제의 ‘명세서’사본을 큼직하게 싣게 되었다.

독일 무관 슈바르츠 코펜은 그 명세서가 자신의 손에 들어오지 않아 모르고 있다가 신문을 보고 그 대상이

‘ 에스떼라지’임을 한 눈에 알았지만 자기와 거래하는 스파이 이름을 적국에 알려 줄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한편 진범인 에스떼라지는 간첩행위나 돈 많은 과부를 꼬여서 마련한 돈으로 방탕하게 사는 비열한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끊임없이 새로운 음모를 꾸미고 다녔다.
‘자신을 버린다면 장군들(당시 메르시에 국방장관, 참모본부 부아테푸르 장군, 조사담당관 취파티 소령 등) 도

끌고 들어가 물고 늘어지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런 와중에서 명세서 글씨가 드레퓌스 것과 다르다는 얘기는 꾸준히 퍼져나갔다.
한 증권브로커가 형 마티외에게 에스떼라지 소령 글씨임을 귀띔했고, 마티외가 에스떼라지를 고발하지만 당국은

겉치레 조사를 하고 구속하지 않았다.

이후 프랑스 사회는 신문을 필두로 불꽃 튀는 싸움을 하게 되었다. 온 세계의 내노라하는 신문들이 이 사실을

앞 다투어 보도했다.

유럽 여러 나라의 신문들은 하나같이 "이제 프랑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며 이 뒤집힌 판결을 비난했다.

어떤 신문은 "사기꾼들이 사기를 예찬했고 협잡꾼들이 협잡 기념비를 세웠다"고 탄식했다.

뒷날 수상으로서 프랑스 국민을 이끌고 제1차 세계대전의 불바다를 헤쳐나간 '호랑이' 클레망소는 이 신문들을 읽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정치가로서는 드물게 드레퓌스를 옹호했던 사람이었는데 민주주의와 지성의 나라임을

자랑삼던 프랑스가 문명세계의 비웃음을 사는 처지로 굴러 떨어진 셈이었다.

드레퓌스 재판을 다시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프랑스 국민은 두 패로 갈라섰다.

재심 요구파와 재심 반대파가 그것이다.

 

 

 


민주주의와 프랑스대혁명의 이념에 반대한 왕정복고주의자와 옛 귀족들, 드레퓌스를 감옥으로 보낸 군부,

유태인 박해에 앞장선 과격한 카톨릭 사제와 신도들, 보수적인 정치가들, 군대의 힘을 키우는 것을 가장 높은 국가 목표라고

믿는 군국주의자들, 그리고 이들을 지지한 수많은 신문들이 재심 반대를 외치며 모여들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유태인 국제조직의 음모에 맞서 국가안보를 지키려면 군부의 위신을 높여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양심 곧은 지식인과 법률가들, 공화주의자와 진보적인 정치가들, 그리고 몇 안 되는 신문들만이 재심 요구파에 가담했다.

처음에는 이 사건을 "유산계급의 집안싸움" 이라며 팔짱을 끼고 있었던 사회주의자와 노동조합이 뒤늦게 여기에 합류했다.

미국과 유럽의 지식인들도 이들에게 지지 성원을 보냈다. 그러나 재심 요구파의 수와 힘은 여전히 너무나 초라했다.

드레퓌스의 앞날은 변함없이 깜깜한 먹구름 속이었다.

그런데 1898년 1월 13일, 절망을 희망으로 뒤바꿔 놓은 큰 폭풍이 몰아쳤다. 클레망소가 운영하던 신문 "로로르"에

프랑스가 낳은 위대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인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발표한 것이다.

그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이 편지를 하루 밤 하루 낮, 그리고 또 하루 밤을 꼬박 새우며 썼다.

졸라는 에스테라지가 진범인 이유를 하나하나 밝힌 다음, 드레퓌스를 죄인으로 만들어 참모본부의 잘못을 감추려 한

장군들과 엉터리 증언을 한 글씨 감정전문가,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선고한 첫 번째 군사재판과 에스테라지에게 무죄를

선고한 두 번째 군사재판을 무섭게 꾸짖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했다.

“ 나는 궁극적 승리에 대해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한 신념으로 거듭 말합니다.

진실이 행진하고 있으며 아무도 그 길을 막을 수 없음을!
진실이 땅속에 묻히면 자라나 더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합니다.
이것이 폭발하는 날에는 세상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것입니다.
내가 한 행동은 진실과 정의의 폭발을 앞당기기 위한 혁명적인 조치입니다.
내가 가진 것은 그토록 많은 것을 이루었고 행복하게 살 권리를 가진 인류에 대한 뜨거운 열정뿐입니다.
나의 불타는 항의는 바로 내 영혼의 외침입니다.
그 때문에 법정에 끌려간다 해도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를 심문하여 주십시오!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

한 사람의 글이 이처럼 막강한 힘을 떨친 일은 세계 역사에서 달리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보잘것없는 신문이던 "로로르"는 이날 무려 30만 부가 팔렸다.

세계 곳곳에서 편지와 전보가 3만 통이나 날아와 졸라에게 힘을 보태 주었다.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은 "뉴욕 헤럴드"에 이렇게 썼다.

“ 나는 졸라에게 깊은 존경과 가없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다르크나 에밀 졸라 같은 인물이 나오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

프랑스는 문명세계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

드레퓌스가 결백하다는 사실이 뚜렷이 드러날수록 재심 반대파는 제정신을 잃었다.

그들은 군중을 선동하여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졸라를 죽여라!" "유태인을 죽여라!" "군대 만세" 따위의

구호를 외치면서 유태인을 죽이고 그들이 경영하는 상점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짓밟았다.

재심 반대파가 깡패와 가난한 사람들을 선동하여 앞장세운 이 폭동은 그야말로 정신병자들의 집단발작이라고 할 만했다.
흥분한 군중은 졸라의 집에 몰려가 돌을 던졌다. 그러자 그 동안 숨죽이고 있던 지식인들이 참다못한 나머지 일제히 나서서

졸라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만들고 서명을 했다.

두 패로 갈라선 프랑스 사람들은 아예 생활을 내팽개쳐 버렸다. 책을 읽지 않았으며 그 좋아하던 극장에도 가지 않았다.

신문을 읽고 말다툼과 주먹다짐을 벌이는 것이 생활이 되었다. 목숨을 걸고 결투를 하는 사람들까지 곳곳에서 생겨났다.

이러한 열병이 사회를 휩쓰는 가운데 법원은 군사법원을 중상모략 했다는 이유로 에밀 졸라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반유태주의자들의 공격 목표가 된 졸라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영국으로 망명했다.

재심 반대파는 전국에서 유태인 상점의 물건을 사지 않는 운동을 조직했고 재심 요구파에 참여한 교수들을 대학에서 쫓아냈다

드레퓌스를 편든 정치가들은 대부분 선거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총칼을 들지 않았을 뿐이지 전쟁이나 다름이 없는

이 싸움에서 재심 요구파의 힘은 여전히 보잘 것이 없었다.

그런데 1898년 8월 39일, 아무도 내다보지 못한 사건이 일어나 싸움의 판세를 단번에 뒤집어 놓았다.

참모본부에 근무하는 앙리 중령이 면도칼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다. 그는 피카르 중령을 감옥에 집어넣으려고

에스테라지와 짜고 여러 가지 문서를 날조한 인물이었는데 그 진상이 탄로날까 두려워 스스로 자결한 것이다. 

'군국주의자이자 반대유태주의자의 영웅 '에스테라지'는 잽싸게 영국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는 영국의 어떤 출판사에서 많은 돈을 받고 자기 이야기를 책으로 써냈는데, 자기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독일의 기밀을 캐내기 위해 독일 무관에게 접근했다는 내용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독일 쪽에서는 자기네를 위해 일하는

스파이로 알았지만 사실을 프랑스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이중첩자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참모본부의 장군들은 할 말을 잃었다. 파리의 신문들은 이제 너나없이 참모본부를 비난하고 나섰다.

재심 반대파의 집단발작도 잦아들었다. 누가 보아도 드레퓌스 재판을 다시 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1899년 6월 3일, 고등법원은 마침내 드레퓌스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1894년 12월의 재판이 무효라고 판결하면서

재판을 다시 열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드레퓌스 앞에서 아직도 험한 가시밭길이 가로놓여 있었다.

 

2편으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