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의 기록

역사독립군 임종국

생게사부르 2016. 8. 28. 23:59

경술국치일에 읽는 역사독립군 임종국

 

오마이뉴스 | 조호진 | 입력 2016.08.26. 21:22

 

 

"아들아 내 친일행적 써라, 내가 빠지면 죽은 책이다"


[역사 독립군 임종국 2-1화] 자기 아버지 '친일'까지 기록... 일본인 교수 "임종국은 무서운 사람"
[역사 독립군 임종국 2-2] 동생 임경화씨가 들려주는 이야기

 

 

 

 

- 선생께서는 부친 임문호의 친일행적을 <친일문학론>에 기록했는데 갈등은 없었나요.

"아버지는 * 최린의 수제자였는데 천도교가 친일로 돌아서면서 간부였던 아버지도 친일노선을 따라가야 했어요.

 아버지가 친일한 게 사실이지만 독립운동자금을 댄 것도 사실이에요.

아버지는 겉으론 친일을 했지만 속으론 나라 찾는 일을 하는 이중생활을 하셨어요.

아버지는 오빠에게 반발하기보다는 역사에 죄를 지었으니 책임도 져야한다고 말씀하셨어요."

 

* 최린: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독립선언에 참여했다가 친일파로 돌아선 뒤 천도교 최고 지도자가 된 인물

 

 부친의 친구이자 고려대 스승인 조용만 교수가 임종국 선생의 주례를 섰다.

임종국 선생은 <친일문학론>에 조용만 교수의 친일행적도 기록했다.

부친과 스승의 친일행적도 역사 앞에 기록한 <친일문학론>은 단순한 고발장이 아니라

반성과 성찰을 촉구하는 진실의 기록이다.

<친일문학론>은 친일파를 규탄하려고 만든 고발장이 아닙니다.

친일역사에 대한 자기반성과 성찰을 촉구한 진실의 기록입니다.

부친과 스승의 친일행적까지 그대로 기록한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일제 당시 신간회 활동과 동아일보 기자생활 그리고, 천도교 간부와 조선농민사 사장을 지낸 임문호는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시국강연 등을 했다가 아들에 의해 <친일문학론>에 기록됐습니다.

자신의 친일행적을 책에 싣는 문제로 아들이 고민하자 임문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빠지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 사실 그대로 써라. 그것이 네가 할 일이다. 나머지는 나의 몫이다.

책임질 일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 대신 한 가지만 부탁하자. 섣불리 평가하지 말고 역사적 사실만 정확하게 기록해라."

- 주례를 서준 조용만 교수의 친일행적도 <친일문학론>에 포함시켰습니다.

인간적 관계가 끊어질 일인데도 두 분의 관계가 좋았다고 들었습니다.
"조용만 선생님은 오빠에게 친일행적을 시인하면서 부끄럽다고 고백하셨어요.

많은 친일파들이 반발하고 따졌지만 조 선생님은 잘못을 시인하면서 오빠를 아껴주셨어요.

선생님께서는 역사 앞에선 잘못을 했지만 역사의 대의를 수긍한 점에선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오빠는 성격이 불같지만 역사를 기록할 때는 감정을 노출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응하셨어요.

친일파와 분노하며 싸우는 것보다 더 무서운 방법 즉, 역사의 기록으로 심판하는 방법을 택하셨어요.

 오빠는 데모도 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데모하게 만든 사람이에요."

병마에 시달리던 오빠의 부탁 "누이야, 연구비가 필요하니 나 좀 도와다오"



▲ 천안시 삼룡동 흑성산 산기슭으로 이사해 외딴집을 직접 짓고는 집 이름을 요산재라고 붙였다.

 요산재는 새로운 주인을 만나면서 단장이 됐으나 사진 속의 창고는 임종국 선생이 지은 그대로다.

- 오빠에게 연구비를 대주었다고 들었습니다.


"1984년이었어요. 오빠가 '연구비가 필요하니 나 좀 도와다오'라고 하셔서 400만 원을 드렸더니

그 돈을 가지고 서울에 자취방을 얻어 국립도서관에서 6개월간 자료를 찾았어요.

 혼자서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휴학 중이었던 중학교 2학년 둘째 조카(연택)를 데리고 갔는데

올케는 요산재에서 돼지와 닭 등 가축을 기르느라 시간이 없어 제가 반찬을 챙겨 올라가곤 했어요.

 상도 없이 신문지를 깔고 밥을 드시는 오빠에게 '이게 무슨 고생이냐!'고 말하면 오빠는 웃기만 했어요.

먼지투성이인 자료를 뒤져서 일일이 손글씨로 베껴 쓰느라 오빠 건강이 더 나빠졌어요.

결국 몸을 돌보지 않고 연구하던 오빠는 병이 더 심해지면서 연구를 중단하고 6개월 만에 요산재로 돌아왔어요

 몸을 조금이라도 아꼈으면 몇 년이라도 더 사셨을 텐데 오빠는 그러질 않았어요.

해야될 일이면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해내는 성격에다

굶어 죽어도 타협하지 못하는 외곬 성격 때문에 사는 게 힘들었어요."



 

▲ 친일청산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님. ⓒ 민족문제연구소

 

 

- 말년의 오빠에 대해 들려주세요.


"오빠의 병세가 심해지면서 산 아래인 천안시 구성동으로 거처를 옮겼어요.

찾아가 보면 산소통에 의지해 숨을 쉬었는데 호흡 곤란으로 얼굴이 퉁퉁 부었어요

 그런 오빠를 살리기 위해 올케가 산속으로 약초를 캐러 다녔어요.

돈이 있으면 장어를 고아드렸고 돈이 없으면 약초를 캐서 보신을 해주었어요.

오빠가 몇 년이라도 더 살 수 있었던 것은 올케의 지극정성 때문이었어요.

"도(道)라는 것은 토굴 면벽수행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교회와 성당에서 기도한다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충실하게 살다보면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하루하루 생활에 충실해라."

죽음을 앞둔 오빠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렇게 말하는 오빠의 얼굴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어요.

오빠는 계획했던 '친일파 총사'(전 10권)를 다 마치지 못하고 죽을까봐 걱정했지 죽음 자체는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결국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마무리하려고 했던 친일파 총서를 다 마치지 못하고

환갑되던 해(1989년)에 돌아가셨어요.

그 이전, 요산재에 살 때도 호흡곤란 때문에 병원에 실려 가곤 했는데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는 오빠를 위해

 기도한 적이 있어요. '우리 오빠 좀 살려주세요. 남자가 자기 할 일을 다 못하고 간다면 얼마나 한이 되겠습니까.

 제 목숨의 5년을 가져 가셔도 좋으니 우리 오빠가 5년만이라도 더 살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는데

저의 기운이 오빠에게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죽음을 앞둔 오빠는 까치가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나뭇가지를 잘라서 장독대에 놓아주고,

떠돌이 고양이에게도 밥을 먹었냐고 물으며 대화를 나누었어요.

그런 오빠를 보면서 오빠는 죽으면서도 세상 때를 묻히지 않고 가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나라 망친 이성계, 이완용, 이승만... 정신 안 차리면 핵무기에 다 죽을 것"


- 선생께서는 한반도가 핵무기 실험장이 되면 민족이 다 죽을 수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요산재에 살 때였어요. 천안 시내를 다녀오신 오빠가 '이 놈의 백성은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것에 미쳐 있다.

 작은 도시에 여관이 몇 개고, 노래방이 몇 개고, 술집이 몇 개인 줄 모르겠다!'면서 개탄스러워 하셨어요.

그러면서 '일본 사람들은 책을 읽는데 한국 사람들은 책을 읽으면 큰일 나는 줄 안다.

 책을 읽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면 개돼지가 된다. 정신 안 차리면 한반도가 핵무기 시험장이 될 수 있다.

 일제 시절에는 차례차례 죽었지만 핵무기가 터지면 한민족 모두가 죽을 수 있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나라도 민족도 망한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며 안타까워하셨어요."

- 역사에 대한 말씀도 남기셨지요.


"한민족은 원래 인심이 넉넉한 민족이었는데 일제에 의해 이 지경이 됐다면서 나라와 민족을 망친 인물로

 이성계, 이완용, 이승만을 꼽았어요.

우리 민족이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고 그대로 요동정벌에 나섰다면 대륙의 기질을 가진

우리 민족은 웅대한 민족이 됐을 것인데

이성계가 반역하는 바람에 당파 싸움이나 하는 좀스러운 민족으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했어요.

오빠가 가장 가슴을 친 것은 현대사였어요. 친일파 이완용은 가렴주구로 번 재산을 지키기 위해 나라를 팔아먹고,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독립운동세력은 이승만에 의해 말살되고 친미파로 둔갑한 친일파들이 득세하면서

 나라와 민족이 어떻게 되든 나만 잘살면 된다는 풍조가 만연해졌다고 탄식하셨어요."


- 친일문제 연구자 오빠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빠는 자신과 가족을 돌보기보다 민족과 역사를 위해 사셨는데 힘들 때는 그렇게 살지 말았으면 했는데

돌이켜보면 오빠의 삶이 옳았어요. 누군가 했어야 할 친일청산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일을 내가 해야 한다면서 목숨까지 바쳐가며 그 일을 하셨어요.

그런 오빠가 자랑스러워요. 오빠의 바람처럼 민족정기가 새로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7년 전, NHK와 인터뷰 했는데 일본인 PD가 살기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살았냐고 묻기에

'가난하게 살았지만 정신적으론 풍부하게 살았다. 지게에 나무를 지고 눈길을 내려오면서도

머릿속에선 차이콥스키의 협주곡이 들리고, 입으로는 구르몽의 시를 읊었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물질의 빈곤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의 빈곤!'이라고 말해주었어요.

그 시절, 올케와 저는 힘들긴 했지만 자부심이 있었어요."

- 끝으로, 임종국 선생 조형물 제작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오빠가 이런 말을 하셨어요. '눈 속에 핀 매화를 보면 사람들이 감탄했다가도

진달래와 철쭉꽃이 피면 매화를 잊어버린다.

그런 것처럼 사람들은 친일문제에 대해 잠시 관심을 갖지만 곧 잊어버린다.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게 내 팔자인 모양이다'라며 한숨을 쉬셨어요.

그런데 친일청산 자금을 대주고 응원해준 국민들과 오빠가 그토록 만들려고 했던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민족문제연구소를 보면 오빠의 삶이 헛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오빠가 이젠 외로워하지 않을 거예요. 오빠는 조형물보다 오빠의 정신, 친일파 청산을 이어주길 바라실 거예요.

 조형물 만드는데 참여하는 모든 분께 오빠를 대신해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친일파가 청산되는 그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어요."

 

 


▲ 임종국 선생 조형물은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 김운성 작가가 제작해 선생의 27주기

추모제인 11월 12일에 맞춰 건립할 계획이다. 사진은 디자인 시안 중 하나다.
ⓒ 김은성

역사의 부름에 응한 재야 사학자 임종국. 선생의 생은 불운하고 불행했지만 흘린 피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선생의 유업을 잇는 역사 독립군이자 조형물 제작 추진위원 4389명이 모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퍼렇게 되살아나는 정의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역사 독립군으로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지켜보실 선생께서는 지난했던 삶이 고통스럽긴 했지만 역사와 정의는 도도하게 흘러왔듯이

 유구하게 흐를 것이라고 육필로 꾹꾹 눌러 쓰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역사 독립군의 최선봉은 선생의 누이 임경화씨입니다. 가난한 오빠에게 옷을 사주고, 연구비를 대주면서,

 외로운 이야기를 들어준 누이 또한 역사 독립군입니다.

연인처럼 사랑했던 열일곱 아래의 막내 여동생, 앳된 소녀였던 누이는 어느덧

이승을 떠날 때의 오빠 나이보다 더 많은 칠순을 넘었습니다.

하지만 육신은 늙어도 그리움은 소녀 시절의 그대로여서 바람 따라 가버린 오빠를

산마루 부는 바람이 되어 만나려고 합니다.

하늘이 갈라놓아
이승과 저승으로
나누인 후,
밭은기침, 땀에 젖은
목덜미 눈에 어리어
오늘도 가슴 저리고
지나가는 사람아!

전생에 연이 있어
한 줄기에 태어나고
한 솥 밥 한 지붕 아래
가슴 나누며 살다
표표히 바람 따라
가버린 사람아!

시린 가슴 타는 갈증
몰려 올 때면
낮은 목소리
다정한 그 마음 생각나
오늘도 그리움으로
또 만나는 사람아!

나 또한 바람 되어 세상 등질 때
어느 산마루 부는 바람으로
다시 만날까?


(1993년 <샘터> 1월호에 실렸던 임경화의 시 '죽은 오빠를 위한 진혼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