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의 기록

진실의 승리, 드레퓌스 사건에서 한수 배우기 (2편)

생게사부르 2016. 9. 14. 00:35

진실의 승리, 드레퓌스 사건에서 한수 배우기 (2편)

 

 

마침내 진실이 거짓을 누르다

 

악마섬의 감옥에서 세상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하고 다섯 해를 산 드레퓌스는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는 도대체 프랑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기억하고나 있을지 조차도 의심스러웠다.

사실 말이 '드레퓌스 사건'이지 그가 한 일이라고는 영문도 모른 채 잡혀가 누명을 쓰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한 것밖에는 없었다. 물론 악마섬 감옥에서 절망하여 자살하거나 병들어 죽어 버렸다면 이 사건은

그대로 묻혀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석방을 위해 노력하는 형 마티외, 아내 루시가 보내 준 믿음과 사랑이

있었기에 견뎌 낼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드레퓌스는 대서양을 건너 브레타뉴에 있는 군 형무소로 돌아왔다.

에밀 졸라도 망명 생활을 끝내고 돌아왔고 피카르 중령도 풀려났다.

다시 군사재판이 열렸다. 드레퓌스는 자기에게 죄가 없다는 것 말고는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라보리 변호사는 법원으로 가는 길에 총을 맞아 병원으로 실려 갔다. 재판 결과는 변함이 없었다.

재판관 일곱 가운데 둘만이 드레퓌스 편에 섰기 때문이다.

달라진 것이라면 드레퓌스가 많은 고생을 했기 때문에 "정상을 참작하여" 종신형 대신 십년형을 내린 것뿐이었다.

에밀 졸라는 다시 펜을 들었다.

“ 이것이 정상참작이란 말인가? 이것은 피고인을 위한 정상참작이 아니라 재판관들을 위한 정상참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정상참작을 한 것이다. 이런 결정은 그들이 규율과 양심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하고 말았음을

고백한 데 지나지 않았다. ... 정의를 실현하려는 외침은 ... 머지않아 온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

프랑스는 어디에 있는가? 프랑스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훌륭하고 정의로운 병사 말고는 아무도

‘내가 여기 있다’고 대답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

정말 그랬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프랑스 대사관 앞에는 이 재판에 항의하는 군중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이듬해 파리에서 열릴 예정이던 세계박람회에 참여하지 말자고 결의하고 자기네 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세계에서 손꼽는 신문들이 한결같이

"드레퓌스가 아니라 프랑스가 범죄자"라는 사설을 실었다.

클레망소와 장 조레를 비롯한 프랑스의 양식 있는 정치가들은 정부를 공격해댔다.

견딜 수 없게 된 대통령은 1899년 9월 19일 드레퓌스에서 특별사면을 내렸다.

자유를 되찾은 드레퓌스는 그리던 아내 곁으로 돌아왔다.

졸라는 변호사 라보리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 나는 싸움이 벌써 끝났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이제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방법으로 정직한 사람과 도둑놈에게

똑같이 특별사면을 준 것입니다. "

 

사면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자기의 죄를 인정해야 앞뒤가 맞다. 그런데 드레퓌스는 죄가 없다 면서도 사면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 동안 진실과 정의를 위해 싸운 많은 사람들은 실망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군가기밀을 누설했다는 얼토당토않은 죄로 재판을 받아야 할 피카르 중령은 누구보다도 크게 낭패를 보았다.

하지만 벌써 다섯 해 씩이나 고생한 드레퓌스로서는 무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감옥에 남겠노라고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드레퓌스 사건을 그만 잊어버리고 싶었다. 모두들 여러 해 계속된 싸움에 넌덜머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드레퓌스는 자기가 겪은 일은 쓴 "악마섬 일기"를 펴내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에밀졸라도 "진실"이라는 소설을 썼다.

그밖에도 이 사건에 대한 책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어떤 책도 실제 일어났던 사건 자체보다 더 감동적일 수 없었다.
에밀 졸라는 빼어난 글과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류의 양심'이라는 찬사와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정의가 이기는 것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1902년 뜻밖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한밤중에 석탄난로 가스가 빠지지 않아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한 것이다.
사고가 아니라 계획된 살인이라는 이야기도 떠돌았지만 분명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드레퓌스 사건을 소재로 장편소설을 쓴 적이 있는 작가이자 비평가인 '아나톨 프랑스'는 장례식에서

졸라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 그는 폭력과 억압으로 사회정의와 공화국의 이념과 자유로운 정신을 목조르기 위해 손잡은 세력의 음모를 백일하에 드러냈다

그의 외침은 프랑스를 잠 깨웠다. 운명과 용기가 그를 높은 곳으로 밀어 올려 한 순간 인류의 양심이 되게 한 것이다.”

드레퓌스는 1904년 3월 재심을 청구했다. 1906년 7월 12일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비로소 막을 내렸다.
발표하면 독일과 전쟁을 해야 할 만큼 중요하다고 하던 참모본부의 '중대한 기밀문서' 따위는 아무 데도 없었다.
진실을 감추고 국민을 속이려고 만든 가짜 증거 문서들만 역사의 뒤안길에 쓰레기로 남았다.

드레퓌스는 무죄선고를 받은 지 열흘만에 군대로 돌아왔다. 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열린 행사에서

그는 육군 소령 계급장과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드레퓌스는 형 마티외와 아들 피엘을 양편에 세우고 지붕 없는 차에 올랐다. 그들이 연병장을 나서자

스스로 모인 20만 군중이 모자를 벗어들고 따뜻한 축하를 보냈다. 창백한 드레퓌스의 얼굴에 잔잔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두 팔을 번쩍 들고 외쳤다.

"프랑스 만세! 진실 만세!" 군중들이 맞받았다.
"드레퓌스 만세! 정의 만세!"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전투에 두 번 참가하여 중령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1935년 7월 11일 병으로 오래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뒷이야기에 따르면 독일 무관 슈바르츠코펜은 드레퓌스가 죄없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했지만

자기의 조국에 충성하기 위해서 못 본 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17년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프랑스말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 들어 봐라, 프랑스 사람들아. 드레퓌스는 죄가 없다. 모두가 거짓말이고 모략이다.

그 사람에게는 티끌만한 잘못도 없다.”

20세기를 연 드레퓌스 사건


 

지금까지 대략의 드레퓌스 사건을 뭉뚱그려 보았다. 서로 믿고 사랑하면서 험한 가시밭길을 헤쳐 나간

드레퓌스 가족의 삶은 오늘날에도 큰 감동을 준다.

 

그러나 우리가 더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꽃피우기 위해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드레퓌스 개인의 생명이나 자기네의 이익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사회진보를 위해 싸웠다.

올곧은 양심과 참다운 용기를 보여 준 피카르 중령,

행동하는 지성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몸으로 가르쳐 준 에밀 졸라,

현명하면서 정열적이었던 정치가 클레망소, 진실의 편에 힘을 보탠 수없이 많은 이름 없는 시민들,

프랑스 민주주의가 무너질 위험에 빠진 것을 안타까워하며 응원을 보낸 다른 나라의 양식 있는 시민들,

이들 모두가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끈 주인공이다.

그들은 유태인에 대한 그릇된 편견을 부채질하여 진실과 정의를 짓밟으려 한 거짓말쟁이 권력자들의 음모를 꺾고

프랑스혁명의 정신과 민주주의를 지켜 냈다.
그들은 이 싸움에서 이김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의 문을 열어 젖혔다.

무엇보다도 프랑스 국민들은 내전에 버금가는 극심한 사회 혼란을 겪으면서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아프게 깨달았다.
드레퓌스 사건이 사회문제로 번진 것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가 결백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공정한 절차에 따라 재판을 하지 않았고 증거가 뚜렷하지 않은데도 유죄를 선고했다는 데 있었다.

만약 절차가 공정했다면, 그리고 증거에 따라 판결을 내렸다면 드레퓌스는 첫 번째 재판에서 풀려났을 것이다.

죄를 지었다는 의심이 간다고 해서 사람을 함부로 잡아두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재판을 하지 않고,

게다가 뚜렷한 증거도 없이 감옥에 보내는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꽃필 수 없다는 것이 이 사건의 첫 번째 교훈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와 국방부 장군들은 군부, 다시 말해 군대를 지휘하는 고급장교 집단의 위신과

이익을 지키는 것이 곧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군대는 합법적으로 폭력을 쓸 수 있는 특별한 집단이다. 그리고 어떤 사회에도 군대를 능가할만큼 큰 폭력을 가진 집단은 없다.

이 때문에 군부가 자기 이익을 국가 이익이라고 착각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큰 문제가 일어난다.

오늘날 민주주의 나라에서라면 어디에서나 군대는 국민이 선출한 국가원수의 말을 잘 따라야 하고 또 잘 따른다.

이른바 문민 우위 전통이다. 드레퓌스 사건은 이 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준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은 지식인들이 이끄는 여론이 얼마나 큰 힘을 낼 수 있는가를 증명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서양 속담처럼 졸라의 글은 재심 반대파가 일으킨 폭동을 이겨 냈다.

졸라는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참다운 지식인으로서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 그래서 불합리한 사회제도에 맞서

사회를 개혁하는 일에 적극 뛰어드는 것이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자랑스런 전통으로 뿌리내렸다.

드레퓌스 사건은 문화 선진국이며 대혁명의 나라인 프랑스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유럽과 북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시민들도 이 거대한 드라마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관심 있게 지켜 보았다.

따라서 모든 일이 끝난 뒤 프랑스 국민들이 얻은 이러한 교훈은 문명세계 전체의 귀중한 보물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어떤 학자들은 드레퓌스 사건이 20세기를 열었다고 한다.

서로 다른 두 세계관과 철학이 충돌한 데서 빚어진 사건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나는 19세기 막바지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을 낡을 세계관이요, 다른 하나는 20세기에 문명사회를 이끌 철학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사건에서 드레퓌스가 한 일은 별로 없다. 에스테라지도 특별히 중요하지 않다.

당시 프랑스 육군에 유태인 피를 이어받은 장교와 다른 나라에 정보를 팔아먹은 스파이들은 그 두 사람 말고도 숱하게 많았다.

따라서 꼭 드레퓌스와 에스테라지가 그런 역할을 맡았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그러나 어떤 사건을 계기로 삼든 간에 이 두 세계관을 지닌 사회집단 사이의 대결은 피할 수가 없었다.

재심 반대파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널리 받아들이는 민주주의 이념에 반대했다.

공화정치 자체를 미워한 왕정복고주의자와 옛 귀족의 피붙이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자기가 국가안보라고 믿는 것을 위해서라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고 무시해야 한다고 확신한

군국주의자 또는 국가주의자들, 있지도 않은 유태인 국제조직을 들먹이면서 유태인을 박해한 인종 차별주의자와

과격한 기독교도들, 사회 혼란은 무조건 경제 번영을 해친다고 생각한 대기업 소유자들이 모두 재심 반대파에 가담했다.

드레퓌스 재판을 다시 열자고 한 이들은 누구인가?

대혁명의 정신을 따르고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해야만

국가안보도 가치가 있고 또 실제로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한 공화주의자들,

인종차별과 인권유린에 반대한 양심 바른 지식인들,

공정한 재판 절차 없이는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고 본 법률가들,

차별과 불평등은 어떤 것이든 거부하면서 자본가들과 맞섰던 사회주의자와 노동조합원들이 바로 재심 요구파였다.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겠지만 20세기는 인류가 민주주의를 더 넓게 그리고 더 철저하게 실현하여 온 시대

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드레퓌스 사건에서 재심 요구파를 이룬 바로 그런 사람들이

낡은 세계관과 철학을 가진 세력을 역사의 무대에서 밀어냄으로써 발전하였다.

이렇게 보면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를 싸움터로 삼아 이 두 세력이 벌인 피할 수 없는 한판 싸움이었으며

20세기에 들어선 첫걸음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