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이 책은 새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새를 다뤄야 하는 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비현실적으로 쾌청한 창밖의 풍경에서 뻗어
나온 빛이 삽화로 들어간 문조 한 쌍을 비춘다
도서관은 너무 조용해서 책장을 넘기는 것마저
실례가 되는 것 같다
나는 어린 새처럼 책을 다룬다
"새는 냄새가 거의 나지 않습니다. 새는 스스로 목욕하므로
일부러 씻길 필요가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읽었다. 새를
키우지도 않은 내가 이 책을 집어든 것은
어째서였을까
"그러나 물이 사방으로 튄다면, 랩이나 비닐 같은 것으로
새장을 감싸 주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긴 복도를 벗어나 거리가 젖은 것을 보았다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구관조 씻기기>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사람에 대한 시다. 정말일까? 자세히 들여다보니, 새에 관한 무의식적인 꿈과 욕망을 노래하는 시라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은 시인이다. 그는 새를 기르는 법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새는 저 순일한 세계 속의 가장 천진난만한 존재다. 새는 가볍고 날개를 가진 덕에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봄의 이랑에서 공중으로 솟구치는 종달새를 본 사람은 드물다. 대지에서 솟아오른 작은 새는 보이지 않는 공기의 넋에 빙의되어 공기의 역할을 흉내 낸다. 종달새는 자취도 없고 그 영롱한 소리, “저 위, 어디선가 황금빛 잔 안에 수정조각들을 짓찧고 있는 소리”(르나르, <종달새>)만이 울려 퍼진다. 그런 까닭에 새는 중력의 그물을 찢고 나는 영(靈)이고, 잠깐 나타났다 빛 속으로 사라지는 우리가 알지 못한 무엇이다. 옥타비오 파스라는 멕시코 시인은 새가 “파닥이는 날갯짓의 눈부심”으로 하늘을 열고, 공중에 흩뿌려지는 새소리는 “비운의 섬광처럼 빛나며 숲을 응고시킨다.”(<태양의 돌>)고 쓴다. 새는 가 닿을 수 없는 꿈의 존재로 중력 때문에 땅에 붙박인 채 사는 사람들에게 섬광같이 반짝이며 하늘을 날며 높이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지금 도서관 바깥은 비현실적일 만큼 쾌청하다. 그 쾌청한 하늘에 새들이 날고 있을지 모른다. 새들은 이내 자취를 감춘다.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신출귀몰한 행태는 놀랍다. “새들은 사방에서 솟구쳐 일어나 투석기로 던져진 듯 하늘로 격렬히 날아오르고 미친 듯 햇볕 속으로 사라져 마치 노래에 다 타버린 듯, 태양에 삼켜진 듯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단눈치오, 《죽은 도시》). 날렵한 새에 견주자면 사람은 마치 응고된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쾌청한 하늘과 그 공간을 채운 빛이 도서관 창문으로 흘러들어와 펼친 책을 환하게 비춘다. 책에는 문조 한 쌍이 보인다. 펼쳐진 책 속의 새는 아직 날아가지 않은 새다. 새들은 이미 시인의 상상세계 속을 날고 있다. 이때 시인의 마음은 창밖 풍경과 같이 평화롭고 쾌청하다. 새들이 그 상상공간을 날 때 시인은 대지적 존재에서 공중의 총아로 변신하는 것이다.
불현듯 김수영의 <서책(書冊)>이란 시가 떠오른다. 김수영은 “덮어놓은 책은 기도와 같은 것”이라고 썼다. 덮어놓은 책은 “잠자는 책”이고, 잠자는 책은 “잊어버린 책”이다. 덮어놓은 책은 누구를 향하여도 열리지 않은 채 던져져 있다. 이 책은 읽지 않은 책일 테고, 이발소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과 다를 바 없다. 읽지 않은 책이란 우리 내면과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물이다. 하지만 <구관조 씻기기>의 시공에 놓인 책은 펼쳐진 책, 읽고 있는 책이다. 읽는 행위는 그저 앎을 얻으려는 단순한 의도만을 갖고 있지 않다. 읽는 행위는 주체의 무의식과 욕망을 타인의 그것에 접속하는 일이다. 접속이란 타인의 꿈과 욕망에 접속해서 자신의 것을 비춰보고 그것을 독해하고 읽어내는 과정을 포괄한다. 예를 들면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이미 카프카의 무의식에 제 무의식을 겹쳐보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들어선다. 시인은 새를 기르는 법을 담은 책을 읽는다. 그 책이 다루고 있는 지식은 앎의 심급에서 그다지 심오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읽는다는 건 그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가 제 욕망과 무의식의 흐름을 읽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읽을 수 없는 것을 읽으려고 하는 것이다. 시인은 어느덧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어 책을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새를 키우지도 않는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어째서였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새를 키우지도 않는 사람이 새를 다루는 책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무의식 어딘가에 새를 키우는 사람에 대한 동경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물음은 책을 펼쳐 읽으며 무심코 드러난 제 무의식의 독해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 책을 통해서 안 것은 새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새는 스스로 목욕하므로 일부러 씻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 앎이 심오하거나 놀라운 것은 아니다. 누구나 상식 정도로 알고 있는 지식이다. 새가 목욕을 할 때 물이 사방으로 튄다. 그때 물방울이 비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새장을 랩이나 비닐 따위로 감싸주어야 한다. 새들이 스스로 목욕을 한다. 물이 사방으로 튀어 실내 여기저기가 젖는다. 마지막 구절에서 반전이 숨어 있다. 책을 덮고 도서관 바깥으로 걸어 나오며, 거리가 젖은 것을 본다. 시인은 거리가 젖은 것을 보고 그 젖은 풍경에 목욕하는 새들이 실내를 적시는 광경을 겹쳐 본다. 새와 새장의 관계, ‘나’와 도서관의 관계가 겹쳐지고 대칭 형태를 이룰 때 돌연 시인이 머물던 도서관과 서책들의 세계가 새장으로 바뀌어버린다. 목욕하는 새와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나’는 크게 다르지 않다. 둘은 세계를 이루는 그 무엇, 대칭적 존재, 그리고 세계 속에서 동시적 현전하는 존재의 표상이다. 이 시가 심오한 무엇을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시는 그저 세계의 찰나에 대한 정관(靜觀), 그리고 뜻밖의 상상, 우연한 발견이 일으키는 즐거움에 바쳐진다.
황인찬(1988~) 경기도 안양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하고,
2010년 <현대문학>의 신인 추천으로 등단
시집: 《구관조 씻기기》
지금 한국 문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시인은 이 첫 시집으로 제31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은 능청스럽게 시치미를 떼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며,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고
이 시인은 모든 익숙한 대상과 현상들을 낯설게 바라보기,
시 아닌 것을 시적인 프레임 속에서 재발견하기에 능란한 솜씨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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