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효근
어느 대나무의 고백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 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속에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컨대
나는 참새 한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제 때에 이냥 베어져서
난세의 죽창이 되어 피 흘리거나
태평성대 향기로운 대피리가 되는
정수리 깨치고 서늘하게 울려 퍼지는 장군죽비
하다 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꿈마저,
꿈마저 꾸지 않는 것은 아니나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바람소리에
어둠 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아아, 고백하건대
그놈들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 그 꽃을 위하여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떨며,다만
하늘 우러러 견디고 서 있는 것이다
저녁먹고 동네 한바퀴
6월 저녁 어스름
어둠이 사물의 경게를 지워 나갈때
저녁먹고 동네 한바퀴
어두워지는 것이 이리 좋은 줄 이제 알게되네
흐릿해져서
흐릿해져서 산도 나무도
무엇보다도 죽도록 사랑하고 죽도록 싸웠던 일들도 흐릿
흐릿해져서
개망초 떼로 피어선 저것들이 안개꽃이댜 찔레꽃이댜
안개꽃이면 어떻고 찔레꽃이면 어뗘
개망초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뗘
꽃다워서 좋더니만
이제 꽃답지 않아서 좋네 이녁
화장을 해서 좋더니
화장하지 않아서 좋을 때가 이렇게 왔네
저녁 이맘때의 공기 속엔 누가 진정제라도 뿌려놓은 듯
내 안에 날뛰던 짐승도 순하게 엎드리네
이녁이라고 어디 다를라고
뭐 죽도록 억울하지는 않아서 세상 다 용납하고 받아들이겠다는 듯
어둠속에 둥글어진 어깨를 보네
이대로 한 이십 년 한꺼번에 늙어지면
더 어둡고 더 흐릿해져서
죽음까지도 이웃집 가듯 아무렇지도 않을 깜냥이 될까
모든일이 꼭 이승에서만이란 법이 어디 있간디
개망초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뗘
꽃이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뗘
그 때 기억할까 못하면 또 어뗘
저녁먹고 동네 한 바퀴
지는 꽃 쪽으로도 마음 수굿이 기울어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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