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김수영

생게사부르 2016. 6. 25. 09:17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김수영

 

비가 그친 후 어느 날-
나의 방안에 설움이 충만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고가는 것이 직선으로 혹은 대각선으로 맞닥뜨리는 것 같은

속에서

나의 설움은 유유히 자기의 시간을 지켜갔다

 

설움을 역류하는 야릇한 것만을 구태여 찾아서 헤매는 것은

우둔한 일인 줄 알면서

그것이 나의 생활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시대이며 밑바닥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아아 그러나 지금 이 방안에는

오직 시간만이 있지 않느냐

 

흐르는 시간 속에 이를테면 푸른 옷이 걸리고 그 위에

반짝이는 별 같이 흰 단추가 달려 있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자꾸 뻐근하면 가는 목을 돌려

시간과 함께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것

그것은 혹시 한 자루의 부채

-그러나 그것은 보일락 말락 나의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것-
하나의 가냘픈 물체에 도저히 고정될 수 없는

나의 눈이며 나의 정신이며

 

이 밤이 기다리는 고요한 사상(思想)마저

나는 초연히 이것을 시간 위에 얹고

어려운 몇 고비를 넘어가는 기을 알고 있나니

누구의 생활도 아닌 이것은 확실한 나의 생활

 

마지막 설움마저 보낸 뒤

빈 방에 나는 홀로이 머물러 앉아

어떠한 내용의 책을 열어보려 하는가

 

 

 

 

 

 

*      *       *

 

 

이 블로거에 올린 첫 시인이 김수영이었습니다.

시 공부를 제대로 해 본 적없이 시작했고

올해 3월부터 '언어를 다루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 

많은 현대시인들의 시를 접하며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만

 

다시  김수영 시인으로 돌아오니 고향같습니다. 

 

제겐 역시 !!!

 

장석주비평집' 시적순간'을 읽고 있고, 이규리, 이원 시에 관심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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