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정한아-무연고(無緣故)

생게사부르 2016. 6. 26. 23:59

정한아


무연고(無緣故)


고문 당한 말들이
원혼처럼 거듭 돌아와 거울 앞에서
자꾸만 제얼굴을 매만지고 있다
내가 이런뜻이었어? 어쩜,
흉측해라, 머리를
묶었다가

풀었다가 화장을

했다가
지웠다가
결국 눈, 코, 입없는 윤곽으로 돌아와
내 얼굴에 제 얼굴을 들이대고

어떻게 좀
어떻게 좀 해보라고

과녁없이 조준점만 난무하는 곳에서
죽을 방법의 다양성과
두루 평등한 고난과
이상을 잊은 자유와
잠든 시간에 몰래 가동하는 몹쓸
차가운 거울
속으로
나는 밤을 뒤집어본다 그것은
구멍 난 양말을 그 구멍으로 뒤집는 것처럼
어쩐지 잔인한 일

뒤집힌 밤은
소리도 고통도 없는데
누군가 거울 밖에서
망치질을 하고 있다

 

2006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어른스런 입맞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