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외국 시

윌리엄 세익스피어 소네트 73

생게사부르 2016. 5. 14. 00:09

윌리엄 세익스피어 / 소네트 73

 

 

 

한 해 중 그런 계절을 그대는 내게서 보리라,
전엔 예쁜 새들이 노래 했지만 이젠 황폐한 성가대석,
추위를 견디며 흔들리는 그 가지들 위에
누런 잎들 하나 없거나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계절을.
내게서 그대는 보리라, 해가 진 후
서녘에서 스러지는 그런 날의 황혼을,
만물을 휴식 속에 밀봉해 버리는 죽음의 분신인
시커면 밤이 조금씩 앗아가는 황혼을.
내게서 그대는 보리라, 불타오르게 해 준 것에
다 태워져, 꺼질수 밖에 없는

임종의 자리처럼, 제 젊음의 재위에
누눠 있는 그런 불의 희미한 가물거림을.
그대가 이것을 알아 차리면 그 사랑 더 강해져,
그대가 머지 않아 잃을 수 밖에 없는 그것을 더욱 사랑하게 되리라.

 

윤준 엮고 옮김(<영국 대표 시선집><실천 문학사. 2016>
한겨레 신문 신형철의 격주시화

" 셰익스피어가 옳다
- 400주기에 읽는 소네트 73" 에서

 

 " 세익스피어가 소네트를 단 한편도 쓰지 않았더라도 그는 위대한 시인이다

<햄릿>에 나오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시작되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독백에는

운(韻, rhyme)이 없지만 이것이 시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그런 그가 소네트를 154편이나 썼으니, 이것은 한 인간이 후대의 인류에게 남긴 선물이다."

 

 

*      *       *

 

 

그런데 이 소네트가 아름다운 여성에게 바쳐진 것이 아니라

연하의 미소년에게 바쳐진 것이라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것도 '전염병 때문에 극장의 수입원이 막혀 한 부자 청년의 결혼을 재촉해 달라'는 의뢰를

받아들여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것은 문학이 늘 아름답고 고상한 동기에서만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일단 펜을 들면,

작가의 젊음과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은 지고지순해 보이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의

1954년 판 최재서 역본도 재미가 있다

" 살아 부지 할 것인가, 죽어 없어질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윤동주 시 '사랑스런 추억'

 

...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라는 귀절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아래와 같은 기사가 보여서....

그 당시 시대상을 십분 감안한다 해도 세익스피어를 순수작가로 보기에는 좀 아닌 듯 하고

  

하긴 작가나 예술가도 그 타이틀 이전에 생활인이니 이슬만 먹고 살수는 없는 법,

'작가는 지고지순 할 것'으로 미리 예단하는 자체가 우리의 편견이겠지요

 

자신의 삶과 작품이 일치하는 사람도 있고, 작품은 작품이고 삶은 또 다른 별개인 사람도 있겠지요.

그럼에도 예술이 그사람의 ' 정신' 이나 ' 영혼'의 재현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어리석은?)사람들은

작가의 삶과 예술이 일치하는 사람들에게 진정성을 갖게 되는데...

 

애초 예술이란 것만 하고 앉아 있으면  배가 고프기 마련이어서...

육신이 살아가야하는 삶과 영혼의 표현으로서의 예술에서 밸런스를 찾지 못하면...

요절하거나 지지리 궁색한 삶을 살게되고

 

글 쓰는 일은 손끝에서 나오는 기교일 뿐 ' 영혼' 과 상관 없다는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가진이는

을 팔아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하면...

'  통속 하다든가 속물 ' 로 여겨지고

 

자기의 예술세계는 ' 지고지순'  한 듯 꾸미면서 일상은 그렇지 못하면

위선자, 이중 인격자' 라고 비난 받기 마련인데

 

' 윌리엄 셰익스피어' ' 인도를 다 주어도 바꾸지 않겠다고 한 ' 세계적인 대 문호의 이면이

' 악덕 대지주에 고리대금업자' 라면 ... 셰익스피어 작품을 사람하는 사람들에게는 좀 충격이겠지요

 

영국의 식민지를 살았던 마하트마 간디의 일곱가지 사회악 중

' 노동없는 부' 와 ' 윤리없는 상업' 은 사회악인데...  

 

한 때 태어나서 살다가 갔다는 그 존재의 흔적만으로도 그 마을 후손들이 대대로 관광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긴 인도의 ' 타지마할' 은 자신의 여성을 위한 헌사로 바쳐졌고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캄보디아를 먹여 살리다시피 하는 ' 앙코르와트'  인들 막대한 권력과 민중들의

희생과 노력의 결과이니

 

 

 

사진 출처: http://britholic.com/40068315533

      

 

텔레그래프와 데일리미러 등 외신은 영국 애버리스트위스 대학 연구팀의 논문을 인용, 셰익스피어가 흉년이 들었을 때

곡물을 모조리 사들여 되파는 매점매석의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냉혹한 사업가였다고 보도했다.

 

...제인 아처 박사, 하워드 토마스 교수 등으로 이뤄진 연구팀은 먼저 셰익스피어가 활동한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

시대 상황을 연구했다. 이때는 '작은 빙하기(Little Ice Age)'로 불린 시기로, 심한 추위와 폭우로 인해 흉년이 이어져 온 영국이

기근에 빠져있던 때다.

 

연구팀은 이 당시 법원및 세금 기록을 살펴본 결과, 셰익스피어가 15년에 걸쳐 곡물, 맥아(엿기름), 보리 등을 사들인 뒤

비싼 가격에 되판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심지어 제대로 돈을 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고리대금업을 펼쳐 이득을 취하는 모습까지 보였다고 주장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1598년 2월 기근 당시 매점매석 혐의로 기소를 당했고, 탈세 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했다.

 

연구팀은 "셰익스피어의 이러한 모습은 그동안 의도적으로 간과된 측면이 있다"며 "그동안 비평가들과 학자들이 셰익스피어가 돈 때문에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연구팀은 이어 그가 살았던 황량한 시대상이 그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예로 기근에 시달리는 로마시대를 그린 그의 희곡 '코리올라누스'를 꼽았다. 특히 식량 부족에 대한 항의 장면은 1607년 당시 농민 봉기와 강한 관련이 있다고 전했다. 또 늙은 군주가 세 딸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차별에 관한 이야기 '리어왕에도 기근 문제가 등장한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셰익스피어 역시 대문호이기 이전에 비참한 세상 속에서 생존을 쫓던 한 가장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그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충고했다.

 

셰익스피어의 이면(異面)을 증명하는 역사적 사실은 '기록' 말고도 또 있다.

연구팀은 셰익스피어가 죽었을 당시 고향의 교회에 ' 곡물 자루'를 쥔 모습의 동상이 있었지만, 그 후에 '대문호'라는 그의 명성에 걸맞게 ' 깃펜' 을 든 모습의 동상으로 대체됐다고 덧붙였다.

 

 

< 신문기사에 부분 보완 >

 

 

이렇든 저렇든

한 시대를 풍미하고 후대까지 그 작품이 남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위로를 줄 수 있는

인물을 배출한 마을이라면 그 정도 축복, 개인적으로는 용서가 됩니다만...

 

작품과 삶이 저렇게 불일치하면 동명이인이었나? 생각하다가 보니 다음과 같은 기사도 있네요

 

셰익스피어가 셰익스피어가 아니라면

작가에 대한 2009. 8. 4. 21:44

"Shakespeare"의 시와 희곡을 쓴 것은 Stratford-upon-Avon 출신의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아니라는 설이 있다는 것과
실제 저자가 Francis Bacon 경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대충 알고는 있었는데,
어제 이 문제에 대한 글을 보고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호기심이 발동했다.
...

스트랫퍼드의 셰익스피어가 셰익스피어라는 걸 믿는 주류 학자들을 Stratfordians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에 반하는 이들은 anti-Stratfordians. 여기엔 마크 트웨인, 오손 웰즈, 찰리 채플린, 프로이트도 속한다.

19세기에는 '실제 셰익스피어' 후보로 Bacon이 유력했는데, 현재 anti-Stratfordian 진영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는
Edward de Vere, 17대 옥스포드 백작 (1550-1604)이라고 한다. 이 설을 지지하는 자들은 Oxfordians라고 부른다.
(Bacon을 지지하는 자들은 Baconians...)

anti-Stratfordian들의 주장 중 몇 가지:

-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쓴 사람은 외국어에 대한 지식을 비롯해 굉장한 어휘력과 여러 분야에 걸친 박식함이 있었다.
그러나 스트랫퍼드 셰익스피어는 대학을 다니지 않은 평민이었다.

- 스트랫퍼드 셰익스피어가 자기 이름을 Shakespeare 스펠링으로 쓴 기록이 없다.
(Shaksp, Shakspe, Shakspe, Shakspere, Shakspere, Shakspeare 여섯 가지 서명만 알려져 있는데,
이 또한 굉장한 악필이어서 어떤 학자는 누군가 필자의 손을 잡아주고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 생애 동안에 유명한 작가였음에도 셰익스피어가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한 장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 스트랫퍼드 셰익스피어는 작은 금액 때문에 소송을 제기한 일이 여러 차례 있는데,
자기 작품의 해적판을 내거나 남의 작품에 자기 이름을 걸고 낸 출판사에 대해 소송을 제기한 적이 없다.

- 스트랫퍼드 셰익스피어의 유서는 꽤 길고 자세히 써졌는데, 어떠한 책 또는 아직 출판되지 않은 작품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그가 소유하고 있었다고 알려진 글로브극장의 지분에 대한 언급도 없다.
책이나 작품, 극장 지분 등은 금전적 가치가 커서, 만약 있었다면 분명히 언급했을 것이다.
(그의 상속인들도 작품이나 지분 등에 대해 보상을 요구한 적이 없다.)

(Twain: "Many poets die poor, but this is the only one in history that has died THIS poor; the others all left literary remains behind. Also a book. Maybe two." 많은 시인은 가난하게 죽지만, 이렇게 가난하게 죽은 자는 없다... )

- 스트랫퍼드 셰익스피어는 1616년에 죽었는데, 1609년에 출판된 셰익스피어 소네트집 표지에는
"our ever-living poet (영원히 살아있는 우리의 시인)"이라는 문구가 나타난다.
"ever-living"은 살아있는 자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 아니다.

- 스트랫퍼드 셰익스피어가 죽었을 때 아무도 그를 추모하는 글을 쓰지 않았다.

- 스트랫퍼드에 있는 무덤가 기념비(상)에서 셰익스피어는 원래 펜이 아니라 곡물자루를 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1709년 이후 언젠가 바뀌었다.


여기에 Oxfordian들의 주장을 몇 가지 덧붙이자면:

- 옥스포드 백작이 죽은 1604년 이후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한동안 출판되지 않았다.

- 셰익스피어 작품에는 최신의 과학적 지식이나 사건이 종종 나타나는데, 1604년 이후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없다.

- 셰익스피어 작품에 언급된 이태리의 도시는 모두 옥스포드가 방문한 도시이며, 옥스포드가 방문하지 않은 도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스트랫퍼드 셰익스피어가 유럽에 갔다는 기록은 없다.)

- 옥스포드 백작과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사건/주인공들 (특히 햄릿) 사이에 수많은 유사점이 있다.
(예: 햄릿처럼 옥스포드도 바다에서 해적을 만나 덴마크의 해변가에 벌거벗은 상태로 남겨진 적이 있다)


이 외에도 수많은 논점이 있지만...

여러 자료를 읽어보니 나도 스트랫포드 셰익스피어가 셰익스피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



출처: https://lunabooks.tistory.com/2 [루나의 책이야기세상]

 

 

등잔 밑이 어둡다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Edward de Vere, 17대 옥스포드 백작 (1550-1604)이라는데...

이전 시대에는 연극인 작가 예술가 등이 ' 딴따라'라는... 사회적으로 천시하는 분위기여서

신분 때문에 가명으로 작품을 썼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고

 

작가의 익명성 때문에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자기마을의 셰익스피어를 내세워 대 문호의 고향으로 만들었다면?

그후 정확한 고증 없이 너도 나도 사실처럼 되어 버렸을 가능성...충분히 있을 수도 있겠네요.

 

이렇게 보면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 지식' 이라는 게 얼마나 단편적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