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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보길도(2)

생게사부르 2016. 4. 4. 00:44

 

 

다시 찾은 보길도(2)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윤선도는 조선 중기 살았던 해남출신의 문신이고 문인이지요.
생몰연대가 1587~1671년 이고 선조때 부터 광해군,인조,효종,현종에 이르기까지 무려 다섯왕에 거치며

양난(왜란 1592-1598, 호란-정묘1627, 병자 1636)시기에 사셨던 분이니 시대가 편하지 않았던 때입니다. 

 

하긴 역사를 보면 언제는 태평했습니까. 늘 '난세(亂世)'였지요.

 ' 태평성대'는 우리의 이상이거나, 간혹 선구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들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 잠시잠시 나타난, 한철 피었다 사라지는 봄꽃과 같았다고나 할까요.

" 화무 십일홍이요,권불 십년 (化無 十日紅 權不十年 )"

광개토대왕, 신라의 성덕대왕 조선의 세종, 영정조등 대왕의 치세기에 잠시잠시 나타났습니다. 

작품이란 작가의 삶의 흔적이고 자신의 생활을 바탕에 전제하고 창작되는 것이라 보면

그는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은 체험하지 못한 듯... 조상이 물려준 유산을 토대로 풍족하고 유복한

삶을 누렸기 때문이겠지요. 그 당시 시대적 특징에 비추어 정쟁에 휘말린 다른 문인들에 비해

천수를 누렸다는 것, 비교적 편안한 일생을 살았다는 얘기일테지요.

 

 

 

 

 

 

      망끝전망대서 본 일몰

 

 

 

               공룡 해변

 

 

 

 

 

17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 1등,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할 정도니 수재였을 테고

봉림, 인평대군의 스승이 될 정도의 학자였지만 당시에 정쟁이 심한만큼 잠시라도 벼슬에 나갔던 사람은

조정의 정쟁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의 가문에 태어나 집권세력인 서인에 강력하게 맞서는 입장이고

강직한 선비정신을 실천하신분이니 출사했다가 파직, 유배 가기도 하고 스스로 물러나기도 하기를 여러차례

거의 20여년 가까운 유배 생활과 19년의 은둔생활만으로도 인생의 절반을 거치게 됩니다.



다행이라면 아버지 윤유심 (尹唯(惟)深)도 관직에 있었고,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숙부 윤유기(尹唯(惟)幾)에

8세에 입양되어 해남윤씨의 대종을 이루었으며 물려받은 재산만으로도 생활이 풍족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조가 병자호란 때 굴욕적 항복을 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원래는 제주도를 목표로 떠났다가

보길도에 안착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부리는 식솔 200여명을 거느리고 산 깊고 물 맑은 아름다운 섬,

보길도(甫吉島)에 머무르다보니 산수가 수려하고 천석이 절승함에 감탄하고 정착하여 이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 명명하였습니다. 격자봉 곁에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齊)라는 편액을 걸고

십이정각·세연정(洗然亭)·회수당,·석실(石室) 등을 지어 놓고 살면서 경서(經書)를 강의하며

후진(後進)을 양성하고 또한 노화도 구석리에 원을 제방(堤防)하여 농토를 개간하여 낙도농어업인(落島農漁業人)의

영농생활에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자연에 몰입하는 운둔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완도 보길도와 향리인 해남이 그 생활의

주무대로 그 생활은 낙서제에서 85세를 일기로 돌아가실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당시 실권자는 우암 송시열을 거두로 하는 노론들이었는데 그들의 질시를 피하고 명리를 버리고 욕심없이 살기위해

      보길도로 들어 올 시기 나이가 육십대 중반인 것 같습니다.

 

후에 우암 송시열도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되는데 가는 도중 보길도에 잠시 들렀을 때 남긴 흔적입니다.

 

 

 

 

 바위에 새겨진 우암 송시열의 시

 

 

 

 

 

 

 

 

 

 

          세연정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풍족한 은거 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그러한 생활 속에서 뛰어난 문학적 재질을

발휘하여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 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표현한 문인으로 평가받습니다.

문학적 특징은 자연을 소재로 하되 그것을 사회의 공통적 언어관습과 결부시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어떤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그것을 임의로 선택하기도 한 개성도 돋보인다는 평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유교의 세계관과 긴밀한 관련을 맺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의 작품은

자연과 직접적인 대결을 보인다든가 생활 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이 아니라 관조하는 자연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 한 예로 동천석실에 가면 큰 바위위에 도르래로 연결해서 한참 떨어진 낙서재에서 음식을 날라다 먹었다고

하고, 고산이 돌아가시고 난 연후에 시신을 모신 초당이 있었는데, 그 섬지역에 남쪽지역 관리나 문인들이 

조문을 올 때까지 기다렸다고 합니다.

 

물론 선생은 문학만이 아니고 정치, 학문, 예술 전반에 걸쳐 조예가 깊고 천문, 음양지리, 복서, 의약 등

다방면에 통달하셨으며, 원림경영과 간척사업을 하여 오늘날까지 전하니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입니다.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歌人)으로 일컬어지나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 75수를 창작한 점이 특이하며 '오우가''어부사시사' 등의 알려진 작품들이 있습니다.

 

 

 

 

 

 

 

 

 

 

 

 

 

 

 

어떻든 생의 말년에 정쟁이 심한 속세를 떠나 계절의 순환 안에서 자연을 벗하며 풍류를 즐기는 삶

정자를 짓고 원림을 가꾸며 어부들과 어우러지는 삶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하나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삶이 후대 우리가 보기에도

속세에서 명리를 쫒는 화려한 삶보다 훨씬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양반이었고 물려 받은 재력으로 ' 소왕국'의 주인일 수 있었던 여건이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민중에 비할 수 없지만 동 시대 비슷한 여건이라 해도 누구나 선택하는 삶은 아닙니다.

 

자연과 함께하는 유유자적한 삶을 살며 천수를 누릴수 있었던 고산 본인 의지이며 지혜의 결실인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