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의 기록/이웃지역 경남 이외 지역

다시 찾은 보길도(3) 고산과 다산, 유병언

생게사부르 2016. 4. 4. 00:55

다시 찾은 보길도(3)

 

 

춘가(春訶) 3

동풍(東風)이 건듣 부니 물결이 고이 닌다
돋다라라 돋다라라
동호(東胡)를 도라보며 셔호(西湖)로 가쟈스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압뫼히 디나가고 뒷뫼히 나아온다

- 완도 보길도지역의 낚시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중에서 
 

 

탁월한 노인 윤고산 선생 卓犖孤山老

 

인품이 속세를 훨씬 벗어난 분이셨네 風標逈出塵

 

화란 막으려 간신배 물리치고 擊奸消禍亂

 

인간질서 세우려고 입바른 상소 올렸네 抗疏正彝倫

 

한나라 조정은 장유(長孺)를 소외시켰고 漢室疎長孺

 

오문에 숨었던 자진(子眞)이었네 吳門隱子眞

 

강력히 주장한 묏자리 때문에 却因風水說

 

천 년 지나도록 충신이 되었다네 天載作忠臣

 

                                       「윤남고에서 써서 부치다[簡寄尹南皐]」

 

 

다산 정약용이 외가 선조에게 바친 시입니다. 1616년 광해 8년, 성균관 유생이던 윤선도는

이이첨의 횡포에 분노해 무서운 상소를 올려 오랫동안 함경도 변두리에서 유배를 살아야 했고,

자의대비 복제(服制)로 기년설에 대항해 3년설을 주장하다 또 오랜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장유는 급암(汲黯)의 자인데 바른말 잘하기로 유명한 한(漢)의 충신으로, 고산도 그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매복(梅福)의 자는 자진인데 세상이 싫어서 은둔해서 살았고,

고산도 세상이 싫어서 보길도에서 숨어 살았다고 말한 내용입니다.

 

 

 

효종의 장례에 고산 윤선도가 추천한 수원의 묏자리, 노론의 반대로 그 장소가 선택되지 못하였는데,

정조 때, 사도세자의 묏자리가 되어 고산 후손들이 큰 대접을 받았답니다.

 

 

비간(比干)은 심장을 갈라 죽고 比干剖心

 

백이(伯夷)는 굶어 죽었네 伯夷餓死

 

굴원(屈原)은 강에 빠져 죽고 屈原沈江

 

고산은 궁색해질수록 더욱 뜻이 굳어 翁窮且益堅

 

죽음에 이르도록 변치 않았으니 至死不改

 

의를 보고 목숨 걸기는 마찬가지였네 其見義守死一也

 

 

                          「미수 허목이 지은 윤선도 묘갈명[海翁尹參議碑]」

 

 

보길도에 대해 흔히 알려 진 정보외에 두가지 이야기를 더 들었습니다.

문화해설사 분이 여담으로 덧 붙인 말이지만 , '부용동'은 섬 안에서도 아주 숨겨진 곳이어서

한 바다에서는 물론 그 섬에 내려서도 전혀 그 장소가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유병언이 보길도 부용동 일대에도 땅을 많이 샀다고 하네요.

 '오대양 사건 이후에 아마 사건이 잠잠 해 질때까지 구원파들이 은둔 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유병언은 일본서 태어나서 대구에서 성장하고 기독교복음 침례교 기반을 두었지만

엄마의 고향이 해남이었다고 한 것 같습니다. 지금도 구원파가 소유하고 있는 듯 보이는

영농조합건물이 방치된 채 남아 있었고요.

 

하긴 전두환,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구원파를 명목으로 내세운 유병언의 재산이

대한민국 어디인들 없었을까요. 외국에도 그 세가 뻗어 프랑스에도 한 마을을 통째로 샀다던가

 

안성 금수원, 여객선사는 인천에, 순천에 순천교회와 연수원 '다판다'를 비롯한 계열회사

완도에 청해진해운, 보성 몽중산다원 녹차 밭이 8개 영농법인 중 하나라고 하고 보길도에까지 땅을 샀다니...

 

한 개인의 삶이지만 그 시대 정치적 실권과 은밀하게 거래를 하며 만들어지는 부정, 부조리는

저제나 그제나...조선시대는 집권과 권력유지를 위한 파당의 이해관계와 유교적인 명리, 관혼상제, 예학이

그 명분이 되었다면, 정경유착을 뿌리로 하는 근 현대는 사리사욕이 그 근저에 있나봅니다 

 

유병언도 외국에서 '아해'라는 사진작가로 알려졌다니 예술가라면 예술가인가요?

그럼에도 고산의 삶의 흔적과 유병언의 삶의 흔적은 격세지감이면서 참으로 다른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또 한가지 얘기는 다소 슬픈 이야기입니다.

문화해설사분이 연세가 지긋하시기도 하셨지만 400m 정도 높이에 있는 동천석실을 안내해서 올라가셔야 하는데,

처음에는 입구까지만 안내 하시겠다 하셨습니다. 관광객이야 평생 두어번 가 보기 어렵지만 해설사분은 매일의

일상이시니 이해 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럼에도 어찌하시다 보니 결국 올라가게 되셨어요.

미인(? 여성)들이 많아서였겠지만... 나중에 동천 석실에 오르고 나서 말씀 하셨습니다.

무릎 관절도 관절이지만... 섬뜩하면서 슬픈 기억이 있다라구요.

한 여성이 죽어 있는 걸 목격하셨답니다. 괜히 꼬치꼬치 묻기가 그래서 속으로 잠깐 묵념만 한 셈인데

 

IMF 때 타격을 받았는지 30대후반 40대 정도 젊은여성이었고 손목을 그었대요. 시신을 운반해서 내려오고

가족들 찾아 수소문하고...그래도 그 당시 돌아가신분 섭섭하지 않게 잘 뒷마무리를 해 주신 것 같아요.

고산 선생이 신선처럼 지내셨던 곳에서 삶을 마감 하시고 싶었던 것일까요.

잘 모르던 분이라도 한 주검 앞에선 참으로 숙연 해 집니다.

대다수 사람이 이렇게 즐거운 맘으로 여행을 왔다 가면서 추억의 한 페이지로 넘기는 데,

죽을 장소를 찾아왔을 심정을 생각하면... 계획적이었든 우발적이든지간에 

 

최근에 복원하면서 한자로 쓰인 현판액자 글씨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지 않고, 한글로 쓰듯이 써 놓았네요.

전문성이 없는것인지 현대화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

 

 

 

 

 

 

   

 

 

 

 

 

 

 

 

 

 

 

 

 

 

 

 

 

 

 

 

 

 

 

 동천 석실에서 바라 본 낙서재

 

 

맞은편에서 바라다 본 동천 석실

 

 

 

 

 

 

 

 

 

 

도르래 시설을 설치 해서 낙서재로부터 음식을 통에 넣어 손쉽게 날라다 먹었다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