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미륵 대원지
‘충주 미륵대원지’(사적 제317호).
해발 378m의 지대에 위치한 미륵대원지는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교통요지의 역할을 했던 계립령(鷄立嶺)에 있으며 백두대간의 월악산지역에 속합니다
일반적으로 절이 창건 이후 전쟁(몽고 침입과 임진왜란, 6.25전쟁)이나 화재, 혹은 시간이 오래 흐르면서 무너져 내려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여러차례 중수를 합니다.
그랬더라도 사찰이 남아 있는 경우, "~ 사" 로 불립니다. 화엄사, 옥천사, 쌍계사처럼요.
그러나 복원할 자료 없이 절 터만 남은 경우 " ~사지" 로 불리지요.
분황사지 연곡사지, 단속사지 같은 경우가 해당합니다.
그런데 '미륵 대원지'는 절과 이전시대 교통 통신의 역할을 맡던 역원(驛院)이 함께 있었던 곳이어서 특이하게
"미륵 대원지"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네요.
하늘재[寒喧嶺]·계립재[鷄立嶺]·새재[鳥嶺]에 둘러싸인 험준한 산골짜기 북쪽 기슭에 북향하여 조성된 석굴을
주불전으로 하는 절터로 석실은 사각형의 주실(主室) 9.8×10.75m이며, 석축의 높이는 6m로 큰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아 올렸으며 석축 위에는 목조 건물이 있었으나 소실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실(前室)은 목조로 축조되었던 석굴과 목조건축의 복합양식을 보여주며 이 석실의 중앙에
대좌를 두어 석불입상이 서 있습니다.
측면과 후면 석벽의 중앙은 감실(龕室)처럼 만들어 작은 불상들이 부조되었으며
석실 상부는 목조 건물로 지어 천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양식으로 보면 고려 초인 10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지형이 북쪽으로 갈수록 낮아져 사원은 북향이며, 사원 전체가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석굴암을 모방한 듯 규모가 웅장하고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발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석불은 머리 위에
팔각의 보개를 쓰고 있으며 거대한 화강암으로 조성하였으나 얼굴 표현에서 온화한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창건 연대나 내력, 사원의 정확한 명칭을 알 수 없으나, 발굴 당시 ‘미륵당초’라고 새겨진 기와가 나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의 사원으로 추정되고 현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96호), 오층석탑(보물 제95호), 삼층석탑,
석등, 귀부(龜趺), 당간지주, 불상대좌 등의 석조 문화재가 남아 있으며 현재 새로 정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사원지로는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여서 그 자료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는데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신라가 망한 후, 자기대에 와서 천년 나라가
무너졌음을 슬퍼하고 허망해 하면서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누이 덕주공주가 지은 월악산의
덕주사를 바라보도록 북쪽을 향해 지었다고 합니다.
1977년 1차 발굴조사 당시, ‘彌勒堂(미륵당)’, ‘彌勒堂寺(미륵당사)’, ‘院主(원주)’ 등의 명문와(銘文瓦)가 출토되어
미륵을 모시는 사찰이자 원(院)을 겸하는 사찰로 '미륵대원’이라고 한 것은 동쪽에 역원(驛院)이 있었기
때문인데 말을 묶어 둔 마방시설, 여행자 숙소 등 역원의 건물터도 함께 발굴되어
사찰과 역원의 기능을 합친 고려 초기의 중요 유적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권1, 왕력(王曆)의 “계립령금미륵대원동령시야(鷄立嶺今彌勒大院東嶺是也)”이라는 기록이 남아 내려 옵니다.
1192년(고려 명종 22) 금당의 기와를 새로 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아울러 석굴과 전실의 목구조가 소실된 것은
13세기이며, 이후 곧 복원되었고 조선 초기에 크게 수리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고
18세기에 들어 수리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언제 폐사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1936년 발생한 큰 수해로 법등(法燈)이 끊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2011년 7월 28일자로 ‘중원 미륵리사지’에서 ‘충주 미륵대원지’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이자, 석조와 목구조를 결합한 석굴을 금당으로 삼은
유일한 유적이고 토함산 석굴암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유일한 석조·목조 구조의 반축조(半築造) 석실사원으로 평가됩니다.
'오층석탑(보물 제 95호)'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96호)' 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전 지명이 괴산리여서
괴산리 오층석탑과 석조 여래입상으로도 부릅니다.
석조 여래 입상은 미륵대원지의 중심 영역에 위치하고 있고 높이가 9.6m로 거대하며 모두 5매의 화강암을
이용해 조성했습니다.
머리에는 얇은 돌 1매로 만든 팔각형의 보개를 얹었고 머리는 나발이며 얼굴은 둥글고 온화한 인상로 이마에는
백호가 크게 양각되어 있고, 눈은 반개하여 길게 표현하였으며, 눈썹은 반달 모양입니다.
코는 나지막하며 입은 도톰하게 표현하였으며 귀는 큼직하게 만들었으나 어깨에 닿지 않으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둥근 보주를 들고 있습니다.
대의는 통견인데 옷주름 등은 간략하게 표현하였고 가슴에서 흘러내린 옷주름은 무릎 부분에서 좌우측으로
약간씩 돌아가게 나타내었지만 뒷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습니다.
얼굴에 비해 신체 부분은 기둥처럼 보이며 발끝까지 거의 같은 폭으로 내려와 입체감이 없고
대좌는 불신의 크기에 비해 작고 안정감이 부족해 보입니다.
같은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천 어석리, 용담사 석불입상의 대좌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 것에 비하여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의 대좌에는 아무런 표현이 없습니다.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은 고려 전기 충주 지역뿐 아니라, 이 시기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상당히 크면서 불신이
사실감 없이 긴 석주 형태로 표현되는 특징은 고려 전기 석불입상의 일반적인 특징입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릴한 이후 성덕와 경덕왕 듣 전성기 중앙에서 국가적 사업으로 조성했던 '불국사'나 '석굴암'에 비해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초 불상의 조성에는 지방의 토호, 호족의 세력이 중심을 이루는데
당시 충주 지역의 호족이었던 충주 유씨 세력의 역할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초의 불상조성 상황을 보여주는 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고 동기들이 모처럼 십대 후반 여고 친구로 돌아가 짓고, 까불고 수다를 떨면서 다닌 하루였습니다.
초파일이 다가오기도 하고... 몇몇 친구들이 연등을 달았습니다.
동피랑도 아이들의 안전과 건강을 위한 등 하나 달았습니다.
부러 사찰을 찾아 다니지는 않지만 이렇게 찾게 된 경우 마음 한 자락 걸어 놓습니다.
딸이 있는 곳이 다소 험한 곳이라 걱정을 하면 딸은 쿨하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 화산 있고, 지진 있고, 강도가 흔한 곳이지만 다 사람 사는 곳이니 살만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제 나라 안 이라고 위험하지 않을 것이며, 이 세상 어느 곳 위험하지 않은 곳이 있을라고요. '
맞는 말입니다. 미국, 유럽도 다 뚫렸고...그럼에도 우리나라 치안 괜찮은 편입니다.
천재지변은 어쩔수 없는 부분이 있지만 , 이전의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대구 지하철 사고
최근의 세월호 사고처럼 '인재'랄 수 있는 부분을 사전에 예방하고 혹 사고가 나더라도 노련하게 대처하는
선진국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다수국민들의 바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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