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안도현
늙은 도둑놈처럼 시커멓게 생긴
보리밭가에서 떠나지 않고 서 있는 살구나무에
꽃잎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자고나면 살구나무 가지마다 다닥다닥
누가 꽃잎을 갖다 붙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는 그가 누구인지
꽃잎을 자꾸자꾸 이어붙여 어쩌겠다는 것인지
나는 매일 살구나무 가까이 다가갔으나
꽃잎과 꽃잎사이 아무도 모르게
봄날이 가고 있었다
나는 호드득 지는 살구꽃을 손으로 받아들다가
또 입으로 받아먹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는데
어느날 들판 한가운데
살구나무에다가 돛을 만들어 달고 떠나려는
한척의 커다란 범선(帆船)을 보았다
살구꽃을 피우던 그가 거기 타고 있을 것 같았다
멀리까지 보리밭이 파도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서 가서 저 배를 밀어주어야 하나
저 배 위에 나도 훌쩍 몸을 실어야 하나
살구꽃이 땅에 흰 보자기를 다 펼쳐놓을 때까지
나는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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