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책등의 내재율/ 엄세원

생게사부르 2021. 1. 21. 10:14

책등의 내재율/엄세원

 

 

 

까치발로 서서 책 빼내다가

몇 권이 기우뚱 쏟아졌다

중력도 소통이라고 엎어진 책등이

시선을 붙들고 있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햇살이

배슥이 꽂혀와 반짝인다 정적을 가늠하며

되비추는 만화경 같은 긴 여운

잠시, 일긋일긋 흔들린다

 

벽장에 가득 꽃힌 책 제목 어딘가에

나의 감정도 배정되었을까

곁눈질하다 빠져들었던 문장을 생각한다

 

감각이거나 쾌락이거나 그날 기분에 따라

수십 번 읽어도 알 수 없는

나라는 책 한권

이 오후에 봉인된 것인지

추스르는 페이지마다 서려 있다

 

벽 한면을 온통 차지한

책등의 숨소리를 듣는다

안쪽의 서늘한 밀착을 느낀다

 

표지가 서로의 경계에서 샐기죽 기울 때

몸 안의 단어들이 압사되는 상상,

책 갈피 속 한 송이 압화 같은 나는

허름하고 시린 과거이거나 목록이다

 

나는 쏟아진 책을 주워 천천히 넘겨본다

벽은 참 출출한 비결祕訣이다

 

 

 

                  - 2021 전북도민 신춘 시당선작

 

 

*      *      *

 

 

심사평을 올리는 것으로 감상을 대신합니다

 

 

" 발상부터가 참신했다. 그리고 구사하는 시어들이 신선했으며 이야기를 끌고 가면서 적절한 알레고리를 설정한 점이 좋았다.

  ‘책등’은 책의 제목이 새겨진 책의 모서리 표상인데, 이를 ‘내재율’이란 어휘로 묶어 놓아 어휘 상호간 절묘한 아이러니를 품는다.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의미의 외연과 책의 안 섶에 꽂힌 섬세한 율성(律性)을 결부시키는 조합은 시의 상징화에 기여한다. 책들은 상호 연대하여 어둠을 빚고 다시 어둔 벽과 암유된 정서를 공유한다. 미명(未明)의 책 갈피갈피는 시적 자아의 생(生)으로 융합을 꾀한다. 감춰진 책 속의 비의는 자아의 잠재의식과도 연계된다. 자아의 감성과 지성의 영혼은 책 속에 압화(押花)로 묻혀 있다가 서서히 빛에게로 나아간다. 출출한 비결(秘訣)이다. 

 / 소재호(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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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전북도민일보(http://www.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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