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史記)꾼/ 김희준
팔지 않겠습니다
은퇴한 별이 너머에서 잠들고 몇 세기 밤이 광물로 굳어
졌다네 이런 밤엔 무엇도 되고 싶지 않네 먹에 끼인 구름을
피해서 계절은 도래하더군 벼루를껍질 삼았다는 말일세 적
어도 글 같은 모양새로 걷지 않겠나 발가락으로 글이 써진
다면 그까짓 변신이 두렵겠나
토막 난 성기는 폐허와 같아 거세된 문장이 동굴을 밝히
면 나는 어둠이 된다네 어둠은 그대로 검정이어서 어떤 걸
넣어도 좋다네 캄캄하게 물드는 것이 손 뿐이겠나 헤집은 곳
마다 내가 튀어나오더군 가끔은 피카이아가 잡히기도 했지
그럴 땐 그것이 고전적 유물론자인지 고대의 투명한 저녁인
지 알길이 없었다네
아무렴, 나는 팔지 않을 작정이네 동굴에는 척추로 생을
쓰는 내가 있었을 뿐이네 실존을 부끄러워하는 까닭은 어둠
을 읽어내지 못한다는 말일세 여기 모두 맹인이 되었다
는 뜻이네
부딪치는 시대에 등이 부서졌네 틈으로 누가 나와도 놀라
지 말게 공(孔)의 제자일 테니 벽화에 붙은 붓을 보게나 남
아서 기록이 된 것인지 살아서 내가 된 것인지 학설로 여기
기엔 애처러운 등을 가졌지 뭔가
천장을 볼 수 없는 이유를 후생에서 찾기로 하지 이를테
면 달의 척삭을 밟고 너머를 봤다든가 유배당한 별이 잠드
는 방향에 대해서 말이네
두루말이 서에 접힌 내가 어떤 것도 팔지 않을 때 어둠은
정설로 남았으면 하네
* * *
< 궁형을 받고 인생을 선택한 사마천의 "사기" 집필 스토리>
사마천은 한 나라때 사람입니다. 기원전 145년 하양이라는 지방에서 조정의 태사령을 지낸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지요. 태사령이란 천문을 관측하고, 달력을 개편하며, 국가 대사와 조정 의례를 기록하는 등의 일을 담당하는 직책입니다. 사마천은 어렸을 때부터 《춘추좌씨전》 같은 고문을 줄줄이 읽던 신동으로 젊은 나이에 전국을 여행하며 문물을 익혔고, 그 후 조정의 관리가 되었다가 돌아가신 아버지 뒤를 이어 태사령에 올랐습니다.
사마천은 한무제의 즉위 후 나라의 명으로 달력 개편 작업에 임하면서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통사 집필을 결심하고 역사 정리에 박차를 가합니다. 그는 전국을 답사하여 보다 정확한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노력했지요. 특히 한무제 치하에서 중국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대를 위해서 역사서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시점
하지만 역사서를 완성하기도 전에 뜻하지 않은 복병으로 인해 그의 인생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당시 외정에 몰두했던 한무제는 이릉(李陵)이라는 장수에게 군사 5,000명을 주어 흉노족을 정벌하게 하였는데 이릉은 서북의 요충지인 거연에서 흉노족과 대치하여 피나는 전투를 벌였으나 끝내 그들에게 항복하고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한 번도 전쟁에서 져본 적이 없는 한무제의 노여움이 하늘을 찔렀고 모든 군신들이 이릉의 삼족을 멸해야 한다느니 이릉을 처단해야 한다느니 하는 말로 한무제의 비위를 맞출 때 사마천은 이릉을 변호하게 됩니다.
이릉이 최선을 다해 흉노족을 막았으나 화살과 군량미 부족으로 더는 싸움을 하지 못한 것이니 꼭 이릉만의 탓은 아니라는 것이 변론의 요지, 그러나 사마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무제는 사마천을 끌어내라 이르고 그에게 사형을 언도해 버립니다. 갑자기 일어난 사태에 사마천은 기가 막혔지만 분기탱천해 있는 한무제 앞에서 그를 변호해줄 신하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사마천
당시 한나라에서 사형을 면할 수 있는 길은 두가지였습니다. 한 가지는 일종의 벌금으로 50만 전을 내고 사형을 면하는 길, 그러나 당시 사마천의 가세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금액이었고 나머지 한 가지 길은 남자로서는 차마 선택하지 못할 끔찍한 형벌인 궁형을 받는 길이었지요. 궁형은 거세를 뜻하는 것으로 차라리 사형을 당하는 것이 더 낫다고 느낄 만큼 가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사마천은 자신의 뒤를 이어 통사를 집필해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고 마침내 결심을 굳혀 궁형을 선택했습니다.
2년 후, 한무제는 그에게 사면령을 내렸고, 중서령(中書令)이란 직위에 봉했는데 이는 황제의 후궁들을 보좌하는 일종의 비서직으로 거세를 당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사마천에게 전화위복이 된 셈이랄까? 궁궐 내부를 자유롭게 왕래하며 각종 사료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이지요. 마침내 그는 모든 자료들을 모은 후 은퇴하여 《중국 통사》 집필에 들어갔지요.
사람이 뜻을 세우고 그 뜻을 평생을 바쳐 이룩해낸다면 실로 위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서 집필에 대한 아버지의 유언을 지켰을 뿐 아니라(그 당시 효는 나라에 대한 충 이상의 미덕이자 개인 삶의 목표가 되기도 합니다)
특히 궁형이라는 치욕적인 형벌을 감수하면서까지 《사기》를 집필하는 필생의 목표를 달성했다는 점
기원전에 살았던 한 개인이 세계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의 반열에 올라 지금 이 시대까지 그 위대함으로 칭송받게 됩니다
사마천의 《사기》는 장장 52만 6,500여 자에 달하는 대기록으로 본기(本記) 12권, 서(書) 8권, 표(表) 10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 등 총 130권에 달하는 역작이었다. 옛 신화 시대부터 전한 초기인 기원전 2세기 말 한무제 시대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본래 명칭은 《태사공기(太史公記)》였으나 후한 말기에 현재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많은 역사서가 있었으며, 과거 황실에서도 관행으로 궁정의 연대기 기록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사기》는 그때까지 나온 역사서들과는 달리 과거의 복잡한 사건들을 질서정연하게 기술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과거의 사실들을 이전의 역사가들처럼 단순히 연대순으로만 정리하지 않고 다섯 부분으로 분류하여 기술하였습니다.
그중 본기(本記)에는 왕실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하면서 연표(表)를 사용하여 독립적인 제후국들의 복잡
한 역사를 명확하게 밝혀 각 제후국에서 어떤 시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한 점
세가(世家)에서는 역사적으로 중요했던 제후들을 다루었고,
서(書)에는 역대 정책과 제도 등을 설명했으며 마지막 부분 열전(列傳)에서는 다양한 인물들의 전기를 다루었습니다. 여기에 선정된 인물들은 영웅, 정치가, 학자, 군인, 일반 서민까지 다양했으며, 주위에 본보기가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마천은 역사를 객관적으로 구성하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중국 역사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교훈적인 역사를 고집해 자신이 서술하고 있는 역사상의 인물들에게 도덕적인 평가를 내렸습니다. 또 다루고 있는 인물들의 행동을 특징에 따라 유형화했는데 어떤 인물이 본보기가 될 행동과 잘못된 행동을 동시에 했다면, 그 행동들을 다른 장에 각각 기록하는 방식을 택하고 각 장의 마지막에는 예리한 논평을 첨가했습니다.
<사기>의 서술 방식은 초기 설화문학이나 소설 같은 문학은 물로 그 이래로 중국 역사서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중국의 영향을 받았던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역사서의 모범으로 인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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