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세계/ 김희준
소나기가 지난다 당신은 내가 알지 못하는 이름을 나열하는 취미를 가졌다
책냄새를 달가워하지 않는 벌레가 낡은 책갈피를 덮는다
서점엔 괜찮다가도 괜찮지 않은 책들이 오르내린다 책장은 만들어지고
가구점에선 나무가 제 생을 다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내 자리 한칸 없다는 사실이 나를 밤으로 내몬다
과일가게에선 늙은 사과가 굴러 다니고 그해 블랙홀은 가운데가 뚫린
모양이라는 기사를 본다 그러면 우리에겐 서로의 심장
이 있다가도 사라지곤 했다
나는 사과를 먹었다가도 다시 뱉어내고 괜찮다가도 괜찮지
않아질 수 있었다
속성을 반복하는 것이 당신의 이름이라면
우린 자라면서 자라지 않는 측백나무 길을 산책로 삼았을 것이다
내리면서 내리지 않는 비를 맞으며 맨발로 걷다가 발에 밟힌
개미를 죽이면서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이 나열한 이름을 되새기면 당신을 잊었을 것이고
당신은 다른 사람 손을 잡으면서 떠났을 것이다
-< 시와경계> 2019.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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