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조정인 폐허라는 찬란

생게사부르 2019. 11. 17. 10:43

 

 

 

폐허라는 찬란/ 조정인


 

  죽음을 미리 끌어다 생필품으로 쓰는 종족이 있다. 아침이면 두런두런 죽
음을 길어 어깨에 붓거나 발등에 붓는다. 입안을 헹구고 향로에 붓는다. 쿠
키를 만들어 접시에 덜거나 우묵한 찻잔, 영원의 바닥까지 그것을 따른다.
일테면 모든 길은 죽음으로 나 있는 명백한 등을 대낮에도 밝혀두는 종족.

  추상이 구체를 뒤집어 쓰는 계절. 먼 목련이 기억을 더듬어 올해의 목련
에게로 거슬러온다. 나무 안에 은어 떼 점차 맑아온다. 혹한과 가뭄,뿌리
가 받아 마신 그늘의 총량이 제련한 저렇게 서늘한 빛.

  죽음을 목전에 둔 짐승처럼 꽃으로 성장한 나무가 목을 들어 길게 운다.
오후 3시, 흰 꽃그늘 아래서는 누구라도 백발이 성성한, 낯선 영역의 인
간이 된다

  올해의 목련이 뎅그렁뎅그렁 조종을 흔들며 산길을 내려간다. 해마다
시리도록 눈부신 종교가 들어섰다가 사라지는 산중턱. 당신은 그 꽃 진 자
리를 폐허라 했고 나는 멍이라 했다. 꽃의 정점으로 죽음의 커브를 그리는
일종의 꽃나무인간들, 흰 수의들 고요한 움직임이 시야를 흘러간다. 지상
의 어떤 종족은 산몸으로 저의 장례를 치른다.


                  - 시집 ' 사과 얼마예요' 2019.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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