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를 펼치는 태양의 책갈피/ 김희준
글을 모르는 당신에게서 편지가 왔다
흙이 핥아주는 방향으로 순한 우표가 붙어 있었다
숨소리가 행간을 바꾸어도
정갈한 여백은 맑아서 읽어낼 수 없었다
문장의 쉼표마다 소나기가 쏟아졌다
태양은 완연하게 여름의 것이었다
고향으로 가는 길에선 계절을 팔았다
설탕 친 옥수수와 사슴이 남긴 산딸기
오디를 바람의 개수대로 담았다
간혹 꾸덕하게 말린 구름을 팔기도 했다
속이 덜 찬 그늘이 늙은호박 곁에 제 몸을 누이면
나만 두고 가버린 당신이 생각났다
찐 옥수수 한 봉지 손에 들었다
입안으로 고이는 단 바람이 평상에 먼저 가 앉았다
늦 여름이 혀로 눌어 붙고
해바라기와 숨바꼭질을 하던 나는
당신 등에 기대 달콤한 낮잠을 꾸었다
해바라기는 태양을 보지 않고도 키가 자란다
기다리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빈 종이에 스며든 그날의 체온이 기척 없이 접힌다
밀도 높은 당신이 하늘에서 쏟아진다
- 반년간 두레문학, 201.상반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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