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내가 살아온 것처럼 한 문장을 쓰다 / 김태경

생게사부르 2019. 9. 9. 14:14

 

내가 살아온 것처럼 한 문장을 쓰다/ 김태경


외로웠구나 그렇게 한마디

물어봐줬다면
물가에 앉아 있던 멧새 한마리
나뭇가지에 어떤 떨리는

영혼을 올려놓고 갔을 것이다
첫 문장을 받았을 것이다
사나운 눈발 속으로 발자국도 없이
검은 늑대가 달리는

계절이었을 것이다
아프냐고 물어봐줬다면

정녕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신에게서 처음이었던

나를 완성했을 것이다
둥근 사방의 지평선을

건너갔을 것이다
단 한마디가 필요했을 뿐

그것만으로도 나는 붉은 먼지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꿈결까지 뭔가 밤새

훔쳐왔어도
남은 것 하나 없이 마른

지푸라기뿐이어도
오로지 단 한 뼘뿐일지라도
일생의 길을 사위스레

멈칫거리다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 앞에서
제 몸을 사가사각

먹어치우는 눈먼 애벌레처럼
진흙 먹은 울음소리로

자기를 뚫고 가는 지렁이처럼



 

 

 

평창 진부

2009. 월간 ' 모던포엠' 등단

시집: ' 별을 안은 사랑' 2019. 북허브

모던포엠 최우수 신인상, 박재삼 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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