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정진규 옷(알 26)

생게사부르 2019. 9. 4. 12:18

 

/ 정진규 
   -알 26


옷 입고 오는 비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처음부터 젖어 있는 알몸이
기에 그는 따로 젖을 필요가 없다 갈아입을 필요가 없다

늘 옷을 입고 다니는 나는, 알몸일 수 없는 나는 젖는다 언제나 갈
아입는다 아직 들키지는 않았지만 젖은 마음의 옷들이 내게는 꽤 여
러 벌이다 내 마음속 벽마다 주렁주렁 걸려 있다 내 마음속 서랍들
마다 가득가득 넘치고 있다 닫을 수도 없다 여기는 햇볕이 없기에
내어 말릴 수도 없다 오직 한 번 그가 다녀간 뒤 그런 날이 있었으
나 그건 옛날이야기다

내 젖은 옷들은 내다 버릴 곳마저 없다 꺼낼 수도 없다 젖은 채로
내 마음속 서랍들마다 벽마다 저토록 넘치고 있으니 이제는 내 마
음을 통째로 버리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 알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비가 오고 있다 오늘 또 한 벌의 옷이 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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