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조정인 백 년 너머 우체국

생게사부르 2019. 8. 20. 20:32

 

 

백 년 너머 우체국/ 조정인 


                                      유리잔이 금 가는 소릴 낼 때, 유리의 일이 
                                                                      나는 아팠으므로




이마에서 콧날을 지나 사선으로 금이 그어지며 우주에 얼굴이 생겼다
그것은 이미 시작되고 있던 일

그의 무심이 정면으로 날아 든 돌멩이 같던 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뜨
거운 물이 부어지며 길게 금가는 유리잔이던 날

그곳으로부터 시작된 질문: 영혼은 찢어지는 물성인가 금 가고 깨어지
는 물성인가 하는 물음 사이

명자나무가 불타오르고
유리의 일과 나 사이 사월은 한 움큼, 으깨진 명자꽃잎을 손에 쥐여주었


나에게 붉은 손바닥이 생길 때 우주에는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

12월로 이동한 구름들이 연일 함박눈을 쏟아냈다 유리병 가득 눈송이를
담은 나는 자욱한 눈발을 헤치고 백 년 너머, 눈에 묻힌 우체국 낡은 문을
밀었다 창구에는 표정 없는 설인들이 앉았는데

나에게는 달리 찾는 주소가 없고 우주는 하얗게 휘발 중이다




                                                    - 시집, ' 사과 얼마예요' . 2019.6. 민음사

 

 

 

 

 

 

 

    서울출생

   1998.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 ' 사과 얼마예요' ' 장미의 내용'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

             제14회 지리산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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