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김경주 주저흔躊躇痕

생게사부르 2019. 5. 22. 00:28

주저흔躊躇痕/ 김경주



몇 세기 전 지층이 발견되었다

그는 지층에 묻혀 있던 짐승의 울음소리를 조심히 벗겨내기 시작했


사람들은 발굴한 화석의 연대기를 물었고 다투어서 생몰 연대를
찾았다
그는 다시 몇 세기 전 돌 속으로 스민 빗방울을 조금씩 긁어내면서
자꾸만 캄캄한 동굴 속에서 자신이 흐느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


동굴 밖에서 횃불이 마구 날아들었고 눈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간을 오래 가진 돌들은 역한 냄새를 풍기는 법인데 그것은 돌 속
으로
들어간 몇세기 전 바람과 빛 덩이들이 곤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

그것들은 썩지 못하고 땅이 뒤집어져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일 시간에 귀속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서로 전이를 일으
키기도 한다

화석의 내부에서 빗방울과 햇빛과 바람을 다 빼내면
이 화석은 죽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연구결과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 바람은 죽으려 한 적이 있다'
어머니와 나는 같은 피를 나누어 가진 것이 아니라
똑 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 시집' 기담' 문학과 지성사, 2008

 

 

 

 

 


 

*       *       *

 

 

어제 인터넷 실검에 등장한 단어 주저흔

 

 ' 주저한다'는 말은 평소에도 자주 사용을 하기에 그렇게 새로운 단어는 아닙니다만 

주저 + 흔이 합쳐지니 낯선 단어처럼 느껴집니

 

'머뭇거린 흔적' 으로 풀어 쓰면 결코 어렵지 않은 용어인 것이지요

 

시인들은 언어를 다루는 사람들이니

단어에 대해서는 일반인들보다 많이 알고 특색이 있는 단어는 시에 차용하여 쓰기를 즐깁니

 

김경주 시인의' 주저흔' 이 발표된 시기가 2008년이니

이미 십년 전에 시 제목으로 뽑혀 사용한 단어라는 것이지요

 

어제 실검에 오른 것은 문학이나 예술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가족의 사망원인을 밝히는 법의학 용어로 사용됐다는 점에서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비극적 선택을 하게된 한 가정 

돌아가신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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