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심보선 인중을 긁적거리며

생게사부르 2019. 5. 19. 15:28

인중을 긁적거리며/ 심보선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뱃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 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 때 내 입술위에 인중이 생겼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잊고 있었다
뱃사람의 울음,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이끌리는 이유,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그 모든 것을 잊고서
어쩌다 보니 나는 나이고

그들은 나의 친구이고
그녀는 나의 여인일 뿐이라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것 뿐일라고 믿어 왔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곳
어쩌다보니,로 시작해서 어쩌다보니,로 이어지는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 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영혼위에 생긴 주름이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쩌다보니 살게 된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언젠가 누군가와 함께......

추락하는 나의 친구들:
옛 연인이 살던 집 담장을 뛰어 넘다 다친 친구.
옛 동지와 함께 첨탑에 올랐다 떨어져 다친 친구.
그들의 붉은 피가 내 손에 닿으면 검은 물이 되고
그 검은 물은 내 손톱 끝을 적시고
그 때 나는 불현 듯 영감이 떠 올랐다는 듯
인중을 긁적거리며
그들의 슬픔을 손가락의 삶- 쓰기로 옮겨 온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
삼일, 오일, 육일, 구일......
달력에 사랑의 날짜를 빼곡히 채우는 여인
오전을 서둘러 끝내고 정오를 넘어 오후를 향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 당기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기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죽음,
기억 없는 죽음, 무의미한 죽음,
내가 가장 두려워 하는 죽음일랑 잊고서
인중을 긁적거리며
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요,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 뿐인 청혼을 한다.




* 탈무드에
천사들은 자궁속의 아기를 방문해 지혜를 가르치고
아기가 태어나기 직전에 그 모든 것을 잊게 하기 위해 쉿, 하고
손가락을 아기의 윗입술과 코 사이에 얹는데, 그로 인해 인중이 생겨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