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2019. 영남일보, 서울신문 신춘 당선 시

생게사부르 2019. 1. 10. 09:20

2019. 신춘 시 영남일보, 서울신문

영남일보


이름/ 서진배


엄마는 늘 내 몸보다 한 사이즈 큰 옷을 사오시었다
내 몸이 자랄 것을 예상하시었다
벚꽃이 두번 피어도 옷 속에서 헛 돌던 내 몸을 바라보는
엄마는 얼나나 헐렁했을까
접힌 바지는 접힌 채 낡아갔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 이름을 먼저 지으시었다
내가 자랄 것을 예상하여
큰 이름을 지으시었다
바람의 심장을 찾아 바람 깊이 손을 넣는 사람의 이름

천개의 보름달이 떠도

이름 속에서 헛도는 내 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에서

까마귀가 날아갔다

내 이름은 내가 죽을  때 지어주시면 좋았을 걸요

이름대로 살기 보다 산대로 이름을 갖고 싶어요

내 이름 값으로 맥주를 드시지 그랬어요

나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 걸요

아무리 손을 뻗어도 손이 소매 밖으로 나오지 않는 걸요

이름을 한번 두번 접어도 발에 밟혀 넘어지는걸요

한번도 집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이불처럼 이름이 있다

하루종일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없는 날 저녁이면 나는

이름을 덮고 잠을 잔다

뒤척이며 이름은 나를 끌어안고 나는 이름을 끌어 안는다

잠에 지친 오전

새의 지저귐이 몸의 틈이란 틈에 박혔을 때

이름이 너무 무거워 일어 날수 없을 때,

나는 내 이름을 부른다

제발 나 좀 일어나자 

 

 

 

랜섬박스/ 류희석

 

 

 

내겐 매일 허들을 넘다 실패하는 광대들이 살아요

 

불필요한 기념일이 빼곡한 달력, 숨 쉴 날이 없어요

나 대신 종이에 누워 숨쉬는 사람들

밤이 되면 광대는 잠을 자고 나는 일어납니다

 

나는 허들을 치우고 부서진 광대들을 주워 종이 상자에 집어넣습니다

그늘을 뿌리는 거대한 인공나무, 물을 줘요 잘 자라서 더 크고 뾰족한 허들을 만

들어 내렴

 

그렇지만 모든 게 나보다 커져서는 안돼,

 

광대들은 일도 하지 않고 아침마다 이불을 걷어냅니다 나는 토스트처럼 튀어 올라

침실을 접어 내던져요 나를 어지럽히는 벽시계와 발목에 생긴 작은 구멍들이 사라

지지 않고 계속 커집니다

 

방이 비좁아서 나는 밖에 있습니다 밖이 끝나면 집에 돌아가 상자를 만들어야 해요

재사용 종이는 거칠고 단단해서 반성에 알맞습니다

천장에 붙어 기웃거리는 가녀리고 얇은 나의 광대들

반성이 시작된 집은 무덤 냄새가 나는 요람 같아요

 

나는 탄생부터 기워 온 주머니를 뒤집습니다 바닥은 먼지로 가득찹니다

도무지 채워지질 않는 상자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실패와 실종

 

내가 죽으면 광대들은 허들을 넘을까요

궁금해서 죽지도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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