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박형준 무덤 사이에서

생게사부르 2018. 12. 13. 16:57

박형준


무덤 사이에서


내가 들판의 꽃을 찾으러 나갔을 때는
첫서리가 내렸고,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였다.
추수 끝난 들녘의 목울음이
하늘에서 먼 기러기의 항해로 이어지고 있었고
서리에 얼어붙은 이삭들 그늘 밑에서
별 가득한 하늘 풍경보다 더 반짝이는 경이가
상처에 찔리며 부드러운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내가 날려보낸 생의 화살들을 줍곤 했었다.
내가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영혼의 풍경들은 심연조차 푸르게 살아서
우물의 지하수에 떠 있는 별빛 같았다.
청춘의 불빛들로 이루어진 은하수를 건지러
자주 우물 밑바닥으로 내려가곤 하였다.
겨울이 되면, 얼어붙은 우물의 얼음 속으로 내려갈수록 피는 뜨거
워졌다.
땅 속 깊은 어둠속에서 뿌리들이
잠에서 깨어 나듯이, 얼음속의 피는

신성함의 꽃다발을 엮을 정신의 꽃씨들로 실핏줄과 같이 흘렀다.
지금 나는 그 징표를 찾기 위해
벌거벗은 들판을 걷고 있다.
논과 밭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 무덤들은 매혹적이다.
죽음을 격리시키지 않고 삶을 껴안고 있기에,
둥글고 따스하게 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영혼을 껴안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봉분들은 밥그릇을 닮았다.
조상들은 죽어서 산 사람들을 먹여 살릴 밥을 한상 차려 놓은 것인가.
내가 찾아 헤매다니는 꽃과 같이 무덤이 있는 들녘,
산 자와 죽은자가 연결되어 있는
밥공기와 같은 삶의 정신,

푸르고 푸른 무덤이 저 들판에 나 있다.

찬 서리가 내릴수록 그 속에서 잎사귀들이 더 푸르듯이,

내가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나를 감싸던 신성함이

밭 가운데 숨 쉬고 있다

어린아이들 부산을 떨며 물가와 같은 기슭에서 놀고

농부들이 밭에서 일하다가 새참을 먹으며

죽은 조상들과 후손의 이야기를 나누던 저 무덤,

그들과 같이 노래하고 탄식하던 그 자취를  따라

내 생이 제 스스로를 삼키는 이 심연속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간다.

겨울이 되면, 저 밭가의 무덤 사이에 누워

봉분들 사이로 얼마나 밝은 잠이 흘러가는지

아늑한 그 추위들을 엮어 정신의 꽃다발을

무한한 죽음에 바치리라.

나는 심연들을 환하게 밝히는 한 순간의 정적 속에서

수많은 영혼들로 이루어진 은하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아직 어린 아이였을 때 내려다 보던 지하수의 푸른 빛을,

 

추위 속에서 딴딴해진 그 꽃을 캐서

 

나는 집으로 돌아 가리라.

 

 

- 월간 문학사상 2009.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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