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김행숙 덜 빚어진 항아리

생게사부르 2018. 11. 18. 12:31

덜 빚어진 항아리


김행숙


나는 너를 항아리 만드는 사람으로 키운 줄 알았더니, 너는 항아리 깨뜨리는 사람이 되었구나. 항아리를 빚는다는 것은 안과 밖을 만드는 일이다. 밖이 있어야 안이 생긴다. 안이 있어야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나의 항아리는 밖으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안으로 비밀을 보존한다. 이대로 영원히 멈췄으면, 기도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이 나의 항아리의 형식을 결정한다.

항아리는 혼돈입니다. 안인 줄 알았더니 밖에 버려져 있더군요. 그래서 밖이구나, 했는데 안에 갇혔더란 말입니다. 잘 빚어진 항아리*나 덜 빚어진 항아리나 깨지기 쉬운 건 똑같고, 깨지면 환상이 깨지듯 항아리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려요. 항아리를 만들어야 항아리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태어나야 죽을 수 있습니다. 가마에 불을 지피며 죽음을, 다가오는 죽음을 뜨겁게 묵상합니다. 선생님은 죽음의 불꽃 속에 있지 않습니까?

나는 나의 항아리를 깨뜨리려고 너를 키웠구나. 너는 도끼를 들고 글을 쓰는 거냐? 손목은 도끼를 들어 올리려 하는데 도끼가 손목을 부러뜨리는구나. 어리석은 자여,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라면 무기가 너를 사용할 것이다. 말하라, 내가 누구냐? 내가 누군 줄 알아야 네가 누군지 알지 않겠느냐.

선생님이 항아리를 만들면 나는 항아리를 깨겠습니다. 어떤 항아리에서는 술이 익어가고, 어떤 항아리에서는 시체가 썩어갑니다. 어떤 항아리에서는 뱀이 기어 나오고, 어떤 항아리 속에는 총 한 자루가 끈적이는 침묵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항아리에 손을 넣는 것이 두렵습니다. 항아리에서 손을 빼는 것이 더 두렵습니다. 선생님의 손은 어디에 있습니까? 선생님은 선생님의 말을 이해 못하고, 나는 나의 말을 이해 못합니다. 어느덧 누가 누구의 말을 하는지, 누가 밖에 있고, 누가 안에 있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는 한 개의 항아리도 완성하지 못하지 않았느냐. 한번만 더 묻자. 너는 누구냐? 네가 누군 줄 안다면, 내가 누군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클리언스 브룩스 ' 잘 빚어진 항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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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이든 예술이든 도제 장인이든

스승이나 사부가 제자에 의해 깨지게(?) 되는 게 발전 아닐까요?

인간대 인간으로야 개인의 자존심 문제일 수도 있지만

스승이나 사부는 자기를 능가하는 제자를 길러 냈다는 의미에서는 사회적 성공인 것이지요.

 

제자는 사부에게 순종하지만 작품에서 만큼은 거스르고 반항하면서... 한 단계 발전, 진전하는 거겠지요.

전前세대는 다음 세대가 새 작품을, 새 시대를 창조해 가도록 밑거름이 되는 것..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스승이 제자를 이용해 개인적 이익을 얻으려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거

 

대학교수들 중에 연구는커녕 정치활동,경제활동 하느라 권력자들에게 얼굴 도장 찍으러 다니거나 언론에 얼굴

내밀며 명성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자 연구 논문에 이름 올려 연구업적 무임승차 하고 심지어 연구업적이나 연구비를 가로채면서

제자를 마치 비서리듯 사적인 생활에 동원하고...

 

그래도 쬐끔 양심이 남은 사람은 다 제자를 위한 일이라고 정당화하거나 합리화 하고

영 양심도 없는 사람은 이전에 ' 우리도 다 그렇게 해서 이 자리에 왔다. 원래 그런 것이다' 라든지

' 나도 그렇게 했기 때문에 니들이 그러는 거 당연하다' 든지

 

이전에 그래 왔더라도 양심이나 윤리적으로 옳지 못하면 누군가는 그 잘못된 관행을 끊어야 하는 것이지요.

 

선생님처럼 ' 잘 익은 항아리' 빚기가 어려운

' 덜 익은 항아리'를 빚을 수 밖에 없는 제자

제대로 된 시 한편 쓰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얘기가 되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