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5.
사실 이 블로거를 시작 할 때, 사회생활 35년의 일상이었던, 그래서 다른 어떤 부분보다 잘 알고 있고,
여지껏 시간과 노력을 바쳐 열정을 다했던 영역 두 분야는 다루지 않기로 마음 먹었더랬습니다.
자칫 제 인생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일이 될수 있음에도 그러고 싶었습니다.
그 두 분야 중 첫째는 '교육과 그에 관련한 활동'이고 두번째는 역사 중에서 특히 '국사'부분은
다루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두가지 분야를 얘기하거나 논하면 혈압이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젊을 때는 그래도 버텨 냈지만 이제는 버틸 재간이 없어서 제가 피하는 게 상책이라 생각했습니다.
상담공부를 시작한 계기 중에 우리나라 역사에서 올린 열을 다스리기 위해서라는 것도 이유에 들어갑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인간이 무엇인지 알아보면서 좋은 詩를 접하고 그림이나 사진을 감상하면서
여행 다닌 거나 올려서 정리해 보려고 블로거를 시작했었거든요.
그러나 '사회 속의 인간'이기에 안 보고 안 들을수 없고, '배운 도적질(도덕질?) 이라는 말이 있듯이
결국 위안부 문제를 5까지 포스팅하게 되었네요.
오늘은 박유하 교수 재판이 있는 날이기도 합니다.
박유하 교수가 그냥 소설을 썼더라면 하는 생각 하나.
전공이 문학이고, 소설은 '허구'에 기반하니까 상상력이 동원돼도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또 한가지 이미 십년도 더 전에 있었던 사건도 떠 오릅니다.
그 즈음 한창 인기를 얻고 있던 여배우 이승연씨가 모바일 세미누드 화보를 찍으면서, 하필이면
'종군위안부'를 소재로 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일
당시 젊은 여배우들의 모바일 누드화보가 대세라면 대세였고, 이승연씨보다 훨씬 노골적이고
노출이 심한 경우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왜 이승연씨가 문제가 됐을지 개념을 가져 볼 일이지요.
' 역사적 소재로 관심을 끌어 상업적으로 돈벌이를 하려고 그랬다' 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한창 젊을 때 아름다운 몸매를 기념으로 남기고 싶어서 그랬다' 뭐 그 비슷한 이유를 들면서
문제가 되고 나서도 계속 강행을 하다가 ...할머니들 앞에 가서 무릎끓고 사죄하고
원본을 공개적으로 폐기하고 그 이후, 자숙하면서 활동을 못한 기간이 6,7년 되었던가요?
본인이 의도하지 않게 약소국에 살았다는 죄로 역사의 피해자가 된 할머니들에게 또 한번 상처를 입힌 일이었으며
이승연씨 본인에게도 비싸게 치른 삶의 교훈이었을 겁니다.
과거의 경험에서 뭔가를 배우지 못하는 개인, 민족은 또 다시 되풀이되는 잘못에 휘말릴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어떻든 '일제 강점기 역사"가 한번은 정리되고 청산되어야 하니 그 과정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명칭은 다양합니다.
여자정신 근로대(정신대), 일본군 위안부(위안부), 종군 위안부, 일본군 성노에(성노예)
위안소, 강간센터 등... 뭐라고 불리든지간에 그 실체는 하나입니다.
오늘은 ' 니들은 어째 구경만 하노?' 하는 주제로 실렸던 자료 중에 그 당시에는 살아 계셨지만
지금은 돌아가신 김순덕, 강덕경 할머니께서 자신들의 회한의 삶을 그림으로 남겨 전시회를 하기도 했고,
또 '낮은 목소리'로 영화를 찍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그 부분 정리해 보려 합니다.
강덕경 할머니
강 할머니는 1919년 2월 진주시 수정동에서 태어났고,지금의 진주초등학교(옛 요시노보통학교, 중안초등학교)를
다녔으며, 31회 졸업생이다 .
강 할머니가 살아생전 했던 증언에 의하면, 요시노보통학교 고등과 1학년인 16세에 일본인 남자 교사의
꼬임에 넘어 가 '여자근로정신대' 1기로 진주와 마산 등지에서 모인 사람들과 함께 부산에서 발대식을 가진 뒤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 후시코시 공장에서 힘든 생활을 하다가 공장에서 탈출하던 중 일본 군인에게 납치당하여
4개월간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해방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왔으며 위안소 생활중 임신이 되어
낳았던 남자아이는 4살때 폐렴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 뒤 할머니는 부산 등지에서 고된 일을 하시며 평생 혼자 살다가 1992년 정부에 등록했고,
95년 폐암선고를 받고 투병 끝에 97년 2월 2일 68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더러운 일본의 민간기금을 절대 받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할머니는 살아생전에 그림을 그려 작품을 남겼는데 위안부 생활을 화폭에 담아 국내와 일본 등지에서
일곱 차례의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라바울은 파푸아뉴기니 오른쪽에 있는 뉴브리튼섬의 중심지로서 일본군의 남태평양 최대 전략기지였다.
강덕경 할머니가 겪은 경험이 아니라 다른 피해자 할머니의 설명을 듣고 그린 그림이다.
눈을 가리고 누워 있다
김순덕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순덕 할머니 운명 ( 2004.6.30)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이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또 한 명의 할머니가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둬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고 김순덕(83) 할머니는 30일 아침 갑자기 나눔의 집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서울 아산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오후 1시 55분께 끝내 숨졌다. 고인의 빈소는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고인은 1921년 경상남도 의령에서 2남 3녀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1937년 17세 되던 해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말에 속아 일본 나가사키로 끌려가면서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해야 했다.
그 후 중국 상해의 위안소에 끌려갔다가 이후 남경을 거쳐 1940년 일본군 장교의 도움으로 귀국했다.
이후 1993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을 한 고인은 방광염, 백내장 등의 신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불안증으로 고생하였는데 그림 그리기를 배우면서 과거의 상처가 많이 회복되었다.
귀국하고 결혼하여 자식도 낳았지만 나눔의 집에서 다른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계시며
부지런 하셔서 나눔의 집 사령관 역할을 톡톡히 해 오셨다고 한다
고인은 잔혹했던 위안부 생활과 실상을 그림을 통해 전 세계에 알리는데 많은 기여를 했으며
피해 할머니들의 상징이 된 ‘못다핀 꽃’ 외에 '끌려감' 등 작품이 남아 있다.
매주 수요일마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시위에 참가하면서 일본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해왔다.
할머니는 2004년 6월 30일, 늘 참여했던 시위날인 수요일 아침, 사망했다.
나눔의집 관련자는 "나눔의 집을 방문한 모든 이들에게 처음 보는 얼굴이라도 이런 저런 말을 붙이며 편안히
대해주시던 할머니셨다"고 회고하면서 "결국 일본정부로부터 어떠한 사죄도 받지 못한 채 응어리진 한을 안고
갑작스레 돌아가셔서 안타깝기만 하다"고 밝혔다.
.
영화 <낮은 목소리 포스터 1> (변영주 감독)
혜화동 나눔의 집 시절, 머니의 모습이 담담하면서도 쓸쓸하게 담겨 있는 영화다.
정신대 문제를 대중에게 널리 소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께서 이승연에게 띄우는 글
..
애야..
나는 너 같은 손녀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니가 나의 썩고 있는 육신을 보지 않았으니, 그렇게 말짱한 입술로
맹랑한 생각을 하였는지 몰라도,
난 그래도 너 같은 손녀라도 있었으면 좋겠단다.
한때..나도 너만큼이나 뽀얀 속살로 벌판을 누비며,
홍조 띈 얼굴로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면서 재잘거리던
너만큼이나 철없던 계집아이 시절이 있었단다.
부자집은 아니어도 건장한 청년 만나서
초가 삼간에 살아도 이쁜 아이 낳아 옥수수 심고
고추심어 나즈막하게 살아가는 것이 소원이었던 사람이었다.
처음엔 무서웠어.
조금 지나니 고통스럽더라..
그래도 세월이라고 시간이 흐르고 차라리 죽을 수 있는 건
행운이라고 여길 즈음..난 고향으로 돌아왔단다.
살아 있다는 것이 악몽이라는 걸..니가 지금 느끼느냐?
나는..수십년을 그렇게 지옥속에서 살았단다.
나는..나를 놓아 버린 것이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나는..여자 였던 것도 오래 전의 일이다..
너는..마음만 먹으면 너처럼 고양이 눈을 하고 있는 딸아이를 얻을 것이다.
하지만 내 속에는 아이를 만들 수 있는 땅이 없어.
그들이 다 파서 먹었으니..
수십명의 개 떼들에게 내 몸 하나 먹힌건 그래도 별거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고향이라고 돌아와 발을 디딜 곳 하나 없이 만들어 놓고
개 떼들의 습격이 마치 내 의지였던 것처럼 나를 죄인 취급하던
내 사랑하는 조국이 나의 숨통을 더 조여왔던 것 같다.
내가 너를 미워한다면..그건 니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니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니가 나를 모른다고 말하지마라..
나는 그저 너를 대신하여 개 떼들에게 끌려간 것일 뿐이다.
너덜 너덜한 육신을 안고서 돌아와서..
온전한 햇볕 한번 못보고 살아온 내가
지금와서 너에게 사진의 모델이나 되라고 하니까..
내 살아온 것이 오늘 이 꼴을 보려고 했던 것이구나.
나를 동정하지마라..
내 조국이 나를 버리던 그때부터, 나는 누구의 동정 따위를
원하며 살아온 것이 아니다.
나에게 카메라를 비추지마라.
내 육신이 비록 너덜 너덜하지만 너희들이 아무 곳에나 들이대며
플래쉬를 터트릴 그런 삶은 아니었다.
애야..
어떤 때에는 니가 무슨 죄가 있을까..싶었다.
동물원 구경 오는 심정 이었을지도 모를 너에게
나를 고스란히 옮겨 놓으려는 내 욕심이 어리석은 것이라 여겼다.
너처럼 부푼 젖 가슴을 나도 가졌었단다.
너처럼 고운 등을 나도 가졌었단다.
개 한마리 세워놓고, 니가 얼굴에 숯을 바른다고
정녕 니가 내가 될 수 있겠느냐?
니가 그 고운 등을 들이대고, 풀어 헤친 저고리 고름 사이로
하얀 젖 가슴을 내민 것은, 사치였다.
그건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냥 살아도 조국속에 묻힐 것이다.
아마도..
내 눈감을 그날까지 나는 그저 개 떼들의 습격 속에서
다행히도 살아온 병들고 썩고 있는 늙은 할머니로 기억될 것이다.
그것이 안타까워, 나 인것 처럼 하지마라.
정녕..너는 내가 아니다.
고양이 눈을 하고 있는 애야..
들끓는 사람들을 미워하지마라.
그들이..나였다.
왜 진심을 이해해주지 않냐고 원망 하지마라.
수십년을 소외된 채 사회와 단절된 나도 살아온 땅이다.
내가 언제 너에게 많은 것을 바랬던 적이 있었느냐..
내가 언제 너에게 손을 벌린 적이 있었느냐..
정녕 니가 내가 되기를 원한다면, 조용히 눈감고 기도해다오.
내 젊은 시절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게.. 평안하게 잠들도록..
그리고..
내 힘없는 조국을 그래도 안고 갈 수 있도록..
후속 얘기
인권교육센터(센터장 권춘현)는 오는 14~15일 사이 '진주인권학교'를 열고 조형물 건립 추진을 제안하기로 했다.
우리 정부에 등록한 일본군 위안부 가운데 진주 출신이거나 연고가 있는 피해자는 1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으로 살아생전에 "일본은 그냥 물러갈 친구들이 아니야. 또 올 수 밖에 없어"라는 말을 남긴 강덕경 할머니다.
권춘현 센터장은 "정부 등록자 가운데 진주에 본적을 둔 분은 5명이고, 진주와 연고가 있는 분은 11명이다.
생존자는 계시지 않는 것 같은데 자세한 내용은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진주인권교육센터는 "진주 출신 강덕경 할머니를 통해 본 일본군성노예 삶"이란 주제로 오는 14~15일(오후 7시)
진주미디어센터에서 진주인권학교를 연다.
첫날에는 고 강덕경 할머니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에세이 <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의 저자 배홍진 작가를
초청해 할머니의 삶과 그림에 대해 이야기 한다.
둘째 날에는 남해여성회 김정화 회장을 초청해 박숙이(93) 할머니의 삶과 남해에 지난 광복절에 세워진
' 평화의소녀상'에 대해 이야기 한다. 박숙이 할머니는 남해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때 바닷가에 조개 캐러 가다,
강제로 일본 경찰에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강요 당했다.
권춘현 센터장은 여성단체와 시민단체와 힘을 모아 올해 안으로 조직을 구성하고 내년 정도에
건립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 밝혔다.
그는 "아직 명칭은 정하지 않았는데 '평화의 소녀상'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지어야 할 것 같고,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이루어져야 하기에 시민 성금을 모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경남에는 통영 남망산공원, 거제문화예술회관 앞, 남해여성인력개발센터 앞,
창원 마산 오동동문화거리 입구에 각각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2015.9.10. 오마이 뉴스, 윤성효기자
이렇게 이렇게 할머니들은 현실 속에서 사라지시면서 한발 한발 역사속으로 걸어들어 가시는 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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