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손현숙 블랙커피

생게사부르 2018. 7. 6. 17:06

블랙커피/ 손현숙

 

올해도 과꽃은 그냥, 피었어요 나는 배고프면 먹고 아프면 아이처럼 울어요 말할 때 한 자락씩 깔지 마세요 글쎄, 혹은 봐서, 라는 말 지겨워요 당신은 몸에 걸치는 슬립처럼 가벼워야 해요

천둥과 번개의 길이 다르듯 짜장면과 짬뽕 사이에서 갈등하는 거 흙산에 들면 돌산이 그립고, 가슴의 A컵과 B컵은 천지차이죠 한 생에 딱 한 목숨 몸뚱이 하나에 달랑 얼굴 하나, 해바라기는 장엄하기도 하죠

비개인 뒤 하늘은 말짱해요 당신이 나를 빙빙 돌 듯 지구 옆에는 화성, 그 옆에는 목성, 또 그 옆에는 토성, 톱니바퀴처럼 서로 물고 물리면서 우리는 태양의 주위를 단순하게 돌아요

당신, 돌겠어요?

시간을 내 앞으로 쭉쭉 잡아당기다 보면 올해도 과꽃은 담담하게 질 것이고, 때로는 햇빛도 뒤집히면서 깨지기도 하지요


*         *          *

 

늦여름이다. 해바라기의 계절이다. 오늘 하루는 '한 생에 딱 한 목숨 몸뚱이 하나에 달랑 얼굴 하나, 해바라기는 장엄하기만 하'다는 이 말만을 갖고 논다. 늦여름 햇살이 참 노랗다. '글쎄, 혹은 봐서'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도 싫다. 우리는 왜 '말할 때 한 자락씩 깔'고 말하는가. 우리는 왜 시를 쓰고 읽을 때 꼭 한 자락씩 깔고 읽고 쓰는가. 올해도 비가 개면 '우리는 태양의 주위를 단순하게 돌' 것이고 '과꽃은 담담하게 질 것'이다. 달콤한 것이 없는 인생이여. 블랙커피여. <유홍준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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