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한옥마을 3. 전주사고(史庫)
경기전을 돌아 다른 일행을 좇아 후원으로 나오는데,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史庫) 건축물이 눈에 띄었습니다.
생각 해 볼 여지없이 발이 목조 계단에 놓여 이미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국보 제151호 .
이이화 선생은 남대문보다 『조선왕조실록』을 국보 1호로 해야한다고 주장한적도 있습니다만
1997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 500년(태조- 철종 25대) 정치사이자 사회, 문화전반, 서민의 생활상을 알수 있는
소중한 기록유산입니다. 왕조실록은 국왕이 교체될 때마다 편찬되어 축적되었는데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편찬된 역사서가 아니라 권력의 견제 역할을 한
공정성과 익명성을 보장해주는 기록서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실록은 초초(初草)- 중초(中草)- 정초(正草) 등 세 단계로 나누어집니다.
이중 최종적으로 수정, 첨삭해 완성한 것을 정초라고 합니다.
정초본은 두벌씩 작성되어 각각 춘추관과 충주사고에 소장했지만, 멸실에 대한 우려로
세종 21년(1439년)에는 두 벌씩을 더 베껴 전주와 성주에 사고(史庫)를 신설해 봉안했습니다.
한양 창덕궁 내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사고가 바로 조선 초기의 사대사고(四代史庫)입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은 전라도를 제외한 일곱 개의 도가 초토화되었습니다.
당시 읍성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의 사대사고 중 3곳의 사고는 파손되어 기록들이 없어졌고, 남아있던 사고는
전주사고 단 한 곳뿐이었습니다. 만약 전주사고마저 소실된다면 조선의 역사가 지금처럼 소상하게
알길이 없어졌을 겁니다.
당시 지방 유생들이(손홍록, 안의) 자신들의 재산을 털어 실록을 옮길 인부와 말을 구하고
태조 영정과 더불어 마침내 내장산 용굴에 도착하고 370일간 밤을 새우며 조선의 역사를 지켜냈습니다.
그후 그 곳도 안전하지 못하여 선조가 피난 해 있던 해주까지 백성들의 도움을 받아 실록을 옮기게 됩니다.
그런 탓으로 왜란 후에 4벌의 사본을 추가로 작성하여
춘추관(서울), 오대산(평창), 적상산(무주), 마니산 (강화), 태백산(봉화), 이렇게 5대사고에 다시 나누어 보관하였습니다.
후에 춘추관사고 실록은 3번의 화재로 소실되었고, 오대산사고 실록은 일제강점기에 동경제국대학으로 이관되었다가
관동대지진 때 소실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조선초기에는 4사대사고(四代史庫)를 운영하여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고,
임진왜란 후에는 5대사고를 운영하여 실록의 보전을 위해 힘썼습니다.
5대 사고 중 네곳은 산속 깊은 곳입니다.
도서열람이나 관리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전란의 경험이나 화재로 인한 소실을
우려하여 교통이 불편하고 사람들의 접근성이 어려운 곳을 택한 것이지요.
적상산사고 실록은 한국전쟁 때 소실된 줄 알았으나 최근에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보관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마니산사고와 태백산사고에 보관 중이던 실록을
각각 서울대 규장각, 부산의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보관 중이니 북한에 1곳, 남한 2곳에서 보관하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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